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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회 공주대학교 편 - 2014, 오늘에서 보는 4·19 혁명

2015-01-22 17:06:09   , 2097 조회

written by 4월회

2014, 오늘에서 보는 4·19 혁명

* 일 시 : 2014년 11월 6일(목) 14:00~16:00
* 장 소 : 공주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 109호
* 강 연 : 임영형 호서대학교 법대 명예교수
* 주 제 : 2014, 오늘에서 보는 4·19 혁명


1. 들어가면서
1960년에 일어났던 4․19혁명은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거나, 논의될 수 있고, 평가되어질 수 있다. 또한 세대에 따라 가치와 평가도 달라질 수도 있다.
4․19를 직접 겪거나 참여한 세대들과 막연히 전해들은 어린 세대들, 아예 출생 이전의 역사적 사실인 세대들로 구분되어질 수 있다.
2010년에 4․19혁명 50주기를 맞아 4․19관련 각종 기념행사가 있었다. 그들 행사의 공통점은 그 행사에 관여한 사람들이 기성 5~60대 이상의 세대들이었다는 사실이다.
50여년이 지난 오늘에서 4․19를 바라보는 이유는 오늘과 미래에 세대들이 4․19정신을 계승·발전시켜야하기 때문이다.

4․19를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과 미래의 세대들에게 왜 4․19정신을 잊지 말고 계승하면서 오늘과 미래에 발전시켜 나아가야만할 당위성은 무엇일까?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90년대 이후 출생자인 20대, 초․중학생들에게 4․19혁명이 50여 년 전에 있었던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닌, 2014년,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과 미래를 살아갈 다음 세대까지도 반드시 계승·발전시켜 나아가야 할 가치가 4․19정신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하 그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2. 4․19혁명의 의의
4․19혁명은 공식적으로 호칭이 명명되기까지는 여러 가지로 불려졌다.
4․19의거, 4․19학생혁명, 4․19혁명 등 그러나 현재에는 4․19민주혁명으로 불리는데 별다른 이의가 없는 것으로 보아 4․19혁명의 호칭문제는 대체로 해결되었다고 본다. 다만 4․19혁명의 개념이나 의의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다소의 논란이 있었으나 1987년 9차 헌법 개정 내용의 전문에서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 즉, 민주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혁명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나아가, 민주주의의 이념을 지키고 실현하기 위한 4․19정신을 계승, 발전시켜야 함을 함께 명시하고 있다.
때문에 4․19혁명은 민주주의의 주요 가치적 요소인 자유와 정의를 사수하기 위한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시민항쟁으로 개념정의 할 수 있다.

3. 배경과 원인
4․19혁명의 배경은 1948년 출범한 자유당 이승만(정부)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야욕이 그 첫 번째 이유로 꼽힌다.
이미 50년대에 있었던, 1차 개헌(1952년)<대통령의 국회에서의 간접선거에서 국민들의 직선제로>과 2차 개헌(1954년:사사오입개헌)<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2번)제한 철폐>과 자유당과 이승만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들(반공과 조봉암 사건)과 야당탄압,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불법과 불의는 민주주의의 핵심요소인 국민주권의 실현형태인 법치주의와 선거제도를 부정하는 불법선거와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를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행한 일이다.
결국, 불법․부당한 공권역이 정치와 대통령 선거에 개입하여 민주주의를 뿌리째 부정·말살하려는 만행에 대한 시민들의 항쟁을 촉발시키게 되었다.

4. 발단과 전개과정
4․19혁명은 3․15선거가 불법과 부정으로 진행된 직후에 마산과 부산에서 산발적으로 4월 초까지 일어났으나,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못한 소강상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4월 11일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김주열 군의 시신의 모습과 그 시신을 시청 앞 도립병원에 안치되어 있는 처참한 모습을 본 학생·시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으며 그 분위기는 자유의 쟁취와 불의의 타도라는 명분으로 학생들과 시민들을 결집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은 부산과 서울로 전해졌고 4월 15일 서울과, 특히 4월 18일 고대생들의 시위는 서울의 모든 학생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4월 18일에 시위를 마치고 귀교하는 고대생들이 동대문에서 관계기관의 사주를 받은 깡패들에게 습격당한 사건은 타는 불에 기름을 부은 형국이 되었다.
이리하여 4월 19일 서울대(종로5가) 문리대 정치학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화된 시위대와 서울의 거의 모든 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여 시청 앞과 광화문으로 집결하여 중앙청과 경무대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인해서 많은 학생들이 부상당하고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는 4월 25일 대학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희생당한 학생들의 피의 대가를 보상하라”란 구호아래 교수시위로 인해서 4․19는 국민적 공감대와 자유당의 이승만 정부의 퇴진을 초래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는 하야성명을 내고 하와이로 망명길을 오름으로서 4․19혁명은 일단락되었다.

그 뒤의 모습은 허정의 과도정부에 맡겨졌으며
◦ 의원내각제로의 개헌,
◦ 장면내각의 출범,
◦ 반민주행위자 처벌을 위한 개헌(소급, 입법 근거) 등
일련의 상황들이 발전적으로 진행되는 듯 하였으나 자유당 내부의 신파(장면총리) ․ 구파(윤보선 대통령)의 대립, 갈등은 고귀한 학생들의 희생과 국민들의 발전된 민주주의의 열망을 수용하지 못한 채, 정치적으로 또 다른 비극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5. 성과
4․19후에 장면정부의 정치적 대립과 갈등․무능은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를 맞게 되었으며, 그 후 한일국교정상화, 월남파병, 3선 개헌, 급기야는 1972년 10월 유신을 시작으로 길고 긴 암흑기 같았던 유신시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이렇게 유신시대는 종말을 고했으나, 한술 더 뜨는 전두환 소장 일당의 신군부가 등장하여 1980년 “서울의 봄”을 짓밟으며 또 다른 비극적 사건인 광주사태를 야기하게 되었고, 민주화를 위한 국민적 열망은 또 다시 좌절을 겪게 된다.

1986년 정치권에 의한 헌법개정 시도가 무산된 1987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의 “현행 헌법에 의한 정권교체”라는 발언이 도화선이 되어 80년 6.10시민항쟁, 6.29노태우(여당대표) 선언은 국민들이 그렇게도 바라던 대통령 직선제를 주 내용으로 한 여․야 합의 개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87년 9차 개정 헌법 전문에 4․19혁명은 비로서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의 계승으로 헌법에 명문으로 규정되어 4․19혁명의 가치와 평가를 제대로 받게 되었다.
또한, 95년에 출범한 “문민정부”(김영삼 정부)는 1995년 4월 19일에 서울 수유동에 183위의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4․19묘역을 국립묘지로 승격시키고, 4․19혁명 행사를 국가적 행사로 치르게 됨으로써 4․19혁명은 제대로 된 지위를 국가로부터 부여받게 되었다.

6. 맺으며
4․19혁명은 끝나지 않은 미완의 혁명으로 오늘도 진행되고 있는 혁명이라고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언급하고 있다. 이런 전제하에 몇 가지 공통적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1) 4․19정신은 무엇인가?
2) 현재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끝났는가?
3) 우리 국가와 사회의 공동체 의식은?
4) “나”는 “대한민국”이란 정치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떳떳한가?
5) 언제쯤 4․19묘역의 영령들은 편히 잠들 수 있을까?

결국, 4․19혁명은 이런 과제들이 충족될 때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우리들과 우리들의 후손들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이 영원히 확보되는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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