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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회 국민대학교 편 -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혁명

2015-01-22 17:08:11   , 1371 조회

written by 4월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혁명
- 잊혀져 가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위하여 -


* 일 시 : 2014년 11월 11일(화) 13:30~15:30
* 장 소 : 국민대학교 북악관 301호
* 강 연 : 양현승 국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주 제 :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혁명


들어가며 ;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 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年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고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신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 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 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도입 :
❦ 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 ‘4.19혁명’에서 외쳤던 ‘정의와 진리에 대한 타는 목마름’은 젊은 시절의 ‘녹슨 훈장’인가? → 녹이 슬었다면 왜? 녹이 슬었는가? 그리하여
❦ ‘돌을 던졌던 세대’가 ‘다시 돌을 맞는 세대’가 되었는가?
→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 점이 본 강의 내용을 구상하고 원고를 작성하는데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세월이 가니 기성세대가 되고, 기성세대가 되면 다 그런 것인가? 아니면 다른 원인이나 요인이 있는 것인가? 그리고 4.19혁명 정신을 지금 오늘의 시점에서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왜곡되고 폄하된 4.19혁명 정신의 새로운 창조적 계승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원인을 찾기에 골몰했습니다.

저는 전공이 한문학입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 한문을 배우면서 서당의 훈장님께 들었던 점은, 한문이 고래적 유물로 책꽂이에 꽂혀서 먼지가 쌓여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에서 지방 써 주기를 강조) 그래서 지금도 한문공부를 하면서 늘 머리 속에 남아 있는 것은 ‘현실에 필요한 한문이고, 현실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한문이어야 한다는 것이 제 변함없는 믿음입니다.

저의 강의 중에 혹 저의 불민함으로 4.19의 순수한 이념을 잘못 알아 왜곡된 점이 있다면, 강의 후에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4.19혁명 당시 아직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못하고 밑 터진 바지를 입고 사랑채에서 할아버지께 천자문을 읽고 있던 코흘리개였습니다. 그리고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의 칼날이 얼마나 우리 목 가까이에 있었는지도 모르고, 초중고교를 마치고, 1970년 대 후반 대학 시절에 어렴풋하게나마 자유와 민주란 이런 것이겠거니 하며 용기가 없어 적극적으로 민주화운동에 가담하지도 못하고 나름대로 고민과 갈등의 약간 했던 세대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며칠 전 인터넷에 올라온 ‘화면 자료(바르게 살기)’ 하나를 보겠습니다.


무거운 돌에 새겨진 너무나 공허한 외침(?) (- 그 분들의 노력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을 보면서, 올라온 댓글의 내용 중 공허함의 원인은 ‘무엇을 어떻게 바르게 살라는 것인가?’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와 혁신’의 구체적 매뉴얼은 무엇인가? 어찌 보면 우리가 지겹도록 들어왔던 ‘의식 혁명’이니 ‘가치관의 변화’니 하는 것들의 또 다른 공허한 외침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 가지로 압축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우리에게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이중적 가치관의 척결”이었고,
둘째는 “진정한 능력 위주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는 “(배고픈 세대가 만든)행복에 대한 가치관의 혁신”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항목에 대해서 조금씩 상세한 설명을 더하는 것으로 본 강의의 내용으로 삼겠습니다. 첫째, ‘이중적 가치관을 척결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이중적 가치관 형성’의 저변에는 ‘나(우리)’와 ‘남(사회와 국가)’을 전혀 별개의 문제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데 넘을 수 없는 한계를 그어놓고 서로 다른 잣대와 기준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개를 하나로 묶고 일관되게 판단하는 잣대와 기준이 없거나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원인을 우리가 흔히 자기를 합리화하거나 남을 비판하는데 상충적이고 모순된 2종류의 속담과 격언을 사용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저는 그러한 이중적 가치관을 조장하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속담과 격언을 모아본 결과 무척 많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순되고 상충되는 격언과 속담을 수시로 사용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남을 비판하는데 거침없이 사용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실을 바늘허리에 꿰어서는 안 된다’는 과정 중시의 속담이 있는가하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와 같은 결과 중시의 속담, 지연혈연학연을 타파해야 한다고 하고서, 필요한 경우에는 ‘팔은 안으로 굽는다. / 피는 물보다 진하다. / 게는 가재 편이다. / 초록은 동색이다. /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 하고’등의 속담의 본뜻을 왜곡 사용하면서 자신을 합리화 시키다가도 남을 비판비난하기도 합니다.

조선왕조 5백년을 이끌어 온 개인과 국가를 하나로 묶어 준 것은 ‘효와 충’이었습니다. 이 둘은 둘이 아닌 하나였습니다. ‘효자 집안에 충신 난다. / 효는 백행지원이다. / 충신이 되는 것이 효도하는 것이다.’ 등이 그것입니다. ‘공(公)과 사(私)를 구별하라.’더니 정확하게 공과 사를 구별하는 넌-센스(?)가 팽배합니다. 그래서 ‘나와 남’을 구별하는 순간에 우리의 가치 판단은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남(의 자식은)은 군대에 가야하고 ↔ 나는(내 자식은) 군대에서 면제받아야 하고, (남들은)납세해야 국민의 아름다운 의무이고 ↔ 나(우리)는 탈세하는 것이 능력 있고 수완 좋은 사업가인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2개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개인의 선과 공공의 선이 어찌 하나 아닌 둘이겠습니까? 반드시 하나여야 합니다. 일관되게 관철하는 가치관을 확립해야 합니다.

둘째, 진정한 능력 위주의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정석대로 법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능력인으로 인정받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의 지식인에 대한 가치가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능력’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시대입니다. 능력은 다름 아닌 ‘문제 해결력’입니다. 일상적으로 문제 해결력이 높은 사람의 특징은 ➀성실한 사람, ➁분석력이 높은 사람, ➂해당 분야의 오랜 경험자, ➃위기관리 능력이 있는 사람. ➄창조적 사고력이 있는 사람. ➄네트워크가 좋은 사람 등. 그런데 혹시 탈법불법변법로비(뇌물) 등에 능숙한 사람으로 잘못 인식되고, 정석대로 법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무능력자(?)로 이 사회에서 평가절하 되는 것은 아닌가요? 그리고 네트워크가 좋다는 뜻은 이러한 능력보다도 지연혈연학연을 이용해서 탈법불법변법로비(뇌물)를 잘 하는 사람이 수완 좋은 사람으로, 우선시 되는 병든 관념들이, 비정상이 정상으로 보이는 전도된 가치관이, 이 사회와 국가를 썩고 병들게 하는 것은 아닌가? 진정으로 정석과 준법을 중시하는 능력자가 인정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 기성의 헝그리 세대에 의해 만들어진 행복의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물질적 부의 추구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보릿고개를 지나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지금에 와서 ‘잘못된 가치관’이라고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가치관이 끊임없이 생성되어 변화를 선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경제적 부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경제적 부만이 삶의 모두는 아닙니다. 문화인류학에서는 물질적 가치 추구를 ‘문명’이라고 하고, 정신적 가치 추구를 ‘문화’라고 합니다. ‘존재와 생존의 문제’인 물질문명과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의 문제인 정신문화는, 문명과 문화는 둘이 아닌 하나여야 합니다. 수레의 두 바퀴여야 합니다. 하나의 바퀴로는 바로 설 수도 없고 굴러갈 수도 없습니다.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행복을 산술지수로 계산할 때 이룬 것을 이루고 싶은 것으로 나누어 100으로 곱했을 때 계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아직 사회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룬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의 여러분의 행복은 ‘많이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도움닫기를 하고 있는 것’에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학부모들에게 물었습니다. 자식이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이냐고. 대답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월급 많이 받고 편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직장은 세상에서 없습니다. 직장인들의 자랑거리 중에 하나는 ‘편한 자리에 있는 것’라고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능력을 인정받지도 못하고, 얼마 가지 못해서,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 3〜5년 차 5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지금 행복하냐?’고. 75%가 ‘아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대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에 인생을 모두걸기(all-in)를 하는 것에 행복의 가치관을 두면 어떨까요?

타고난 불행을 딛고 일어선 헬렌 켈러는 “앞을 볼 수 없는 불행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눈으로 앞은 보지만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공간적으로 앞을 보는 것은 ‘시각(력)(eyesight)이지만, 시간적인 앞을 내다보는 것을 ‘비전(Vision)’이라고 하지요. 공간적인 시력으로 보는 앞은 변함이 없지만, 시간적인 비전으로 보는 미래는 신념과 의지에 따라서 다르게 보입니다. 저는 요즈음 저와 같은 나이 또래의 기성세대들에게서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우리 세대는 경제개발이니 민주화니 하는 목표를 가지고 살아왔지만, 앞으로의 우리의 다음 세대는 왜곡되고 그릇된 작금의 사회의 가치관을 보고 배워서 어떻게 살아가려는지, 어떻게 글로벌 시대에 세계를 무대로 살아갈려는지, 젊은이들의 삶과 국가의 미래가 걱정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청년 여러분을 믿습니다. 작금의 사회에서 보고 듣고 배우는 것만으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살아가지 않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 함석헌 선생께서는 ‘깨어 있는 국민이라야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비전으로 미래를 보고 살아야가야 하는가는 잘못된 기성세대의 오늘을 반면교사로 바라보는 여러분의 태도를 믿습니다. 그리고 비판과 적극적 수용 속에 여러분은 분명 밝은 미래를 열어갈 주인공이 되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공허한 외침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엇(what)을 혁신해야 하느냐?’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어떻게(How) 혁신해야 하느냐?’를 말씀드리지 않으면 공허한 외침이 될 것입니다. 방법론의 문제, 지극히 어려운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당부 드린 말씀을 기억하시고 관심을 가진다면, 민주사회에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하고 빠른 방법은 ‘선거를 통한 변화’라고 합니다. (저는 정치를 잘 모르지만, 우리나라 국민 정서 속에서는 정당정치는 잘 맞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정당정치의 뿌리 속에는 과거 조선 시대의 당파당쟁의 DNA가 살아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개개인이 늘 변화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깨어 있는 유권자가 되어 진정한 지도자를 선출하여 위로부터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 한 바가지를 정수리에 부으면 발끝까지 젖는다.’는 속담을 믿기 때문입니다. 차선책으로는 앞으로 사회인이 되어서도, ‘목구멍이 포도청 / 먹고 살기 위해서 / 먹을 것을 보면 세 치 앞을 못 본다.’라는 목전의 이익에 눈이 어두운 궁색한 변명보다는 일생을 두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대인(大人)의 학문을 배운, 대학 졸업자로서 당당한 한국인이 되어 주리라 믿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말하지 않고 끝낼 수는 없습니다. 원인 분석과 해결 방안에 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말과 신문에 난 기사와 칼럼 중에서 제 기억에 뚜렷이 남는 말이 있습니다. 원인으로는 “돈(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이다.”와 해결 방안으로는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물질(돈)만의 추구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인가를,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결국 사람이 어떻게 어떤 태도로 자신의 직무에 임하느냐(운용하느냐가), ‘어떻게?’라는 방법론보다는 ‘어떤 자세와 태도인가?’라는 것이겠지요. 당사자(그들)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우리)의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해서 기억에 남았습니다. 대학생활을 보내시는 아름다운 청년 시절에 몸에 확실하게 익히고 사회에 나가야 할 것은 결국 ‘자격’과 아울러 ‘올바른 태도와 자세를 몸에 익히는 것’이라는 것을 당부 드리면서 강연을 끝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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