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회 부산외국어대학교 편 - 타는 바다, 원균 읽기
2015-01-22 17:31:18 , 1304 조회
written by 4월회
타는 바다, 원균 읽기
* 일 시 : 2014년 11월 25일(화) 15:00~17:00
* 장 소 : 부산외국어대학교 트리니티홀 D110
* 강 연 : 김인호 동의대학교 사학과 교수
* 주 제 : 타는 바다, 원균 읽기
1. 실재하는 원균의 삶에 대하여
임진왜란 이후 긴 세월 동안 원균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다양 한 형태로 왜곡되거나 기이한 형태로 미화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공통점은 대부분 자신이 정한 특정한 편견과 편애에 기초하여 원균과 이순신의 행적을 극히 악과 선의 양극에 가까운 삶으로 재창조했다는 점이다. 그렇게 양극에서 두 사람을 대립시켜서 얻는 역사는 반드시 누군가의 목적과 편견에 종속된 사고를 초래한다. 그리고 분석 대상에 대해 색안경을 끼게 만들고, 결국 논리적 으로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은 인격적 침해를 통하여 자신의 편견을 정당화하려 는 욕망을 부른다. 그러므로 원균에 대한 인격적 폄훼의 대부분은 이러한 편견과 편애의 역사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한 당파성이 찌든 글에서, 그리고 인성과 도덕적 가치에 경도된 평가와 도덕적인 양극으로 몰아가는 서술이 만연한 곳에서 과연 ‘실재하는 원균’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편애와 편견의 글쓰기에도 나름의 역사적인 아픔이 있었다. 조선후기 등장한 원균에 대한 그 많은 인격적 폄훼를 다룬 문집이 의외로 원균 의 인척이거나 측근에 의해서 자행된 경우가 많았다. 패장 원균과 함께 함으로 써 모든 사회적 출로가 봉쇄당할 위기감이 그렇게 철저하게 원균을 저버리게 하였다. 자신은 원균과 달라야 忠義롭고 절의가 있는 사람으로 인정되거나 혹은 가문의 영속을 기약할 수 있었다. 원균에 대한 인격적 모독은 오히려 인척 이나 측근에서 더욱 심하게 자행했다.
사회적 원인도 있었다. 원균에 대한 인격적 폄훼 이미지는 의병장(=사족) 중심의 향촌질서 구축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지역 향촌 사회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군과 전투한 지역의 의병장(=사족)들이 자신들의 전공을 바탕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향촌의 패권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그 과정에서 의병장들은 일본군과 용감하게 싸운 기억을 신화화하고 체계화하려 하였다. 자연스럽게 도망·비겁·간신·무능력과 같은 이미지는 지역 사회의 주도권을 쥐는데 용납할 수 없는 ‘배반’과 ‘불의’의 이미지로 정착하였다. 그리하여 의병장 자신들의 용감성과 충의 그리고 지역에 대한 책임감에 대한 강력한 이미지 확립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문중이고, 서원이고, 향약이었다. 이들은 모두 향촌 사회에서 의병장(=사족)의 역할을 강화하는 조치에 몰두하였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전쟁에서 비겁한 행위를 한 사람에 대한 멸시가 뒤를 이었다. 모든 전장에서의 비겁한 행동에 대한 비판은 의병장 권력의 우월성을 보장하는 이미지를 위하여 활용되었다. 지역사회의 패권을 확보하기 위한 의 병장들의 신화창조 작업에 패장 원균 이야기는 활용하기 좋은 사례였다.
한편, 그동안 우리는 지나치게 이분법적인 세상과 판단에 몰두하였다. 사실 인류 역사를 크게 보면 반드시 선과 악의 대립 관계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승자와 패자의 논리에 찌들고 편애의 역사에서 창조된 전통인 선=이순신, 악=원균이라는 해석은 역사로서 제대로 성립하기 어렵다. 그런 생각은 우리 수군의 오랜 문명사적 전통이 단지 한 사람의 태만과 나태로 쉽사리 무너질 하찮은 것으로 전락하게 하는 오류를 낳는다. 나아가 조선사회 를 아주 후진 나라로 매도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상투적인 속임수이기도 했다. 거기에 춘원 이광수가 착각하였고, 친일파 근대화주의자들도 고스란히 그 덫에 걸려들었다.
2. 정의와 신념이 만든 비극
그런 버릇이 아직도 남아 원균에 대한 인격적 폄훼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 다. 실제의 역사에는 늘 바른(바르다고 믿는) 생각과 바른(바르다고 믿는) 생각이 쉴 사이 없이 각축을 벌이는 법이다. 둘 다 올바르다는 신념에 기초하다 보니 일방적으로 승리한 적이 없다. 그러니 늘 이기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 지 않게 되고 그 중에서도 가장 손쉬운 방법이 인격적 침해이고 도덕적 상처이다. 갑자기 없던 아들이 나오고 남녀상열지사의 뒷담화로 상대를 음해하기도 한다. 그런데 세상은 이성과 이성의 충돌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게 쉽사리 도덕적인 사람과 비도덕적인 사람,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그리고 좋은 사람과 이상한 사람간의 대립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순신과 원균의 대립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이성과 이성으로 대립하였지 선과 악으로 드라마틱하게 대립하지 않 았다. 이성과 이성이 충돌하니 더욱 폭력적이고 인격적 폄훼가 동원되었다. 말이 잘 안 통하니 그렇게 욕을 한 것이다. 이처럼 무언가 실패한 원인을 어떤 한 개인의 인격 수준에서 찾으려 하는 시도는 참으로 유치하다. 그리고 몇 개 의 사료만으로 짜서 사료 자체가 가지는 역사적 가치를 파악하지도 못한 채 상 대를 음해하는 총탄으로 사용하는 그 모든 시도가 얼마나 용렬한지 모른다. 언 제나 자신만 옳다고 믿는 ‘편애의 역사’는 아무리 논증을 해도 반대쪽 편애하는 집단에게는 의미 없는 사료의 나열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두 장군이 냉정하게 보았던 그래서 둘 다 옳았다고 믿는 세상을 한 번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정작 원균은 당면한 시대적 과제를 어떻게 파악하고 어떻게 사고하며 어떤 행동양식을 선택하고 그것을 선택하기 위하여 무엇을 고민하였는지, 그리고 해결을 위하여 무슨 계책을 만들고 어떤 실천 유형을 탐색하려고 했는지 실제의 역사를 보고 싶다. 이에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오직 하나이다. 원균과 이순신은 임진왜란을 함께 겪고 합동하여 적을 물리친 조선의 수군 장군이요, 당대의 희망이었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이 함께 할 때 비로소 빛나는 우리 역사를 써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전란 중에서 ‘원균이 없는 이순신은 공세적일 수 없었고, 이순신 없는 원균은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였다.
두 사람이 병립하여 적들이 오는 길목을 막는 전략은 조정의 비변사 대신이 나 현장에 있는 수군 장수들도 공감했던 전략이기도 하였다. 선조는 선조, 원균은 원균, 이순신은 이순신, 비변사는 비변사 다같이 전란의 극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수천 년 우리 역사가 만들어온 지혜와 교훈을 총동원하였다. 다만 현장 수군은 명나라 군대와 육군의 힘을 빌린 수륙 병진 전략으로 승산있는 싸움을 하려고 했고, 비변사 대신은 믿을 만한 우리 수군이 해로차단에 먼저 나서서 전쟁의 향방을 바꾸는 길을 택하였다. 이렇게 현장 수군과 비변사 대신의 이견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급기야 이순신이 하옥 되고 원균이 통제사가 되었으나 원균은 곧장 자신이 만든 해로차단 상소의 덫 에 걸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몰렸다. 이 기회에 조정은 현장을 흔들었고, 자율성이 상실한 수군은 조정의 부당한 명령에 갈팡질팡하였다. 이 는 조정이 현장의 목소리에 눈을 감고 귀를 막은 결과였고, 그 결과가 칠천량 패전이었다. 소통없는 사회 혹은 일방적인 명령사회가 만든 비극이었다.
그런데 크게 보면 일본인들에게도 원균은 이순신처럼 조선 해역을 지킨 명장이었다. 일본인들의 기록을 보면, 이순신과 원균이 결코 다른 사람으로 파악된 적이 없다. 그냥 조선의 수군 사령관으로 동일시되었다. 도도 다타도라 집안의 가문일기인 『등당기』,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행장록인『협판기』, 일 본군 종군 승려인 케이넨의 『조선일일기』 등에서 한결같이 이순신과 원균을 구분해서 파악하지 않았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이순신이 하지 못한 일은 원균 도 할 수 없었다. 원균이 못하면 이순신도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 장군을 나눠서 설명하는 것은 우리 자신 뿐이었다.
물론 군공을 쟁탈하는 과정에서 원균이 인격적으로 거만하거나 포악하거나 하는 기록이 있다. 과연 이러한 기록은 믿을 만한가? 임란 초기 혼란스러운 시기 원균이 배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기록이나 운주당에서 술이나 마시고 기생 과 놀았다는 소문 그리고 원균 부하들이 조선인 어부들의 목을 잘라 군공을 탐했다는 해괴한 소문이 여과 없이 원균의 인격적 파탄을 설명하는데 동원되었다. 과연 어느 정도까지 믿어야 하나? 하지만 사서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어느 것도 전후의 모든 정황이나 사료의 정확도 수준 그리고 사건의 연속적 맥락을 감안할 때, 실제의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후대에 그것이 크게 문제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실은 사실로 재생산되지만 소문은 소문으로 금방 식기 때문이다.
3. 왜 이기고 지고 했나.
그렇다면 왜 이순신은 사지에서 승리하였고, 원균은 사지에서 패전하였나? 그런 면에서 이순신의 위대한 명량대첩은 이순신에 대한 수많은 모함과 억측을 내세운 기록이 실제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순신이 없으면 조선도 없었다. 조선을 구한 이는 바로 이순신이다. 하지만 선조가 말했듯이 전투 에서 지거나 이기는 것은 애국심의 수준하고 상관이 없었다. 원균도 애국적이었지만 장수로서 기교와 판단이 모자랄 경우 패전은 언제든지 가능하였다. 이 순신과 원균의 구분 점은 인격의 차이가 아니라 군사를 움직이는 능력의 차이 였다.
따라서 적어도 원균이 작전 지휘관이라면 나름의 정세판단과 필요한 조치라고 여기는 부분에 대한 자신만의 세계관을 가지고 칠천량 해전에 임했을 수도 있다. 패장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난중일기』와 『선조수정실록』 만으로 그의 고민을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히 비역사적인 논의이다. 사료 몇 줄에 마치 원균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폄훼하려는 시도도 역시 근시안적인 생각이다. 패 장이니 그 점은 반드시 비판을 받아야 하지만 어떻게 패전했는지 본래의 전략 과 실제의 패전 사이에 나타난 변수나 요인은 무엇인지 등 원균이 실패하게 된 진짜 이유를 보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 칠천량 패전이 과연 겁쟁이 원균 한 사람의 나태와 실수만으로 일어난 일일까? 그렇다고 모든 책임이 조선 양반사회 자체의 복마전 때문이었던가? 전자는 우리 역사를 너무 빈곤하게 하고 후자는 우리 역사를 무책임하게 만든 다. 특히 패전은 선조의 잘못 때문이니 당파싸움 때문이니 하는 총체적 책임론은 마치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이 일본인에 아첨하고 나라를 판 친일파에게도 할 말이 있고, 오히려 일제 강점기에는 ‘전 국민이 친일 행위를 했다’는 주장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건달이 약자를 괴롭혀도 주먹이 아니라 사회가 본래 그 런 것이니 만큼 정당하다는 이야기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런 논리라면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어찌 욕할 수 있을까? 이광수는 《동아일보》에 <소설 이순신>을 연재하였고, 거기에는 언제나 야만적이고 미개한 조선왕조 체제의 모순 에 대한 비아냥과 멸망의 당위성이 들어있다. 너무나 소중한 영웅(이순신)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비극이 이미 조선사회에 내재한다는 논리, 일본이 그 런 조선왕조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이순신과 같은 존재라는 점을 전파하 는 묘한 식민주의가 내재하고 있었다.
4. 원균이 인격적 폄훼를 당한 이유
원균에 대한 긴 이야기를 이어오면서 원균이 이처럼 곡해를 받고 인격적 폄훼를 당한 단 하나의 이유를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소통의 부재였다. 따라서 칠천량 전투의 실패 책임은 원균만의 책임이 아니며, 그렇다고 비변사 대신만 의 책임도 아니었다. 단언하건데, 패전은 선조의 책임도 아니며, 도원수만의 책임도 아니며, 원균의 책임도 아니며, 비변사 대신들만의 책임도 아니었다. 즉, 조선사회가 복마전이라서 모든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좀 더 세련되게 각 주체들이 우리 역사가 만들어 온 과학적 전통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현장 수군의 요구와 국가적 요구를 잘 접합하여 가진 역량을 최고도로 이끌어 내지 못한 데 있었다.
지루한 전란 속에서 혹시나 일방적인 명령체계가 더 효율적이라는 욕심이 소통을 막았다. 공포와 일방성이 창조적인 이해를 막으면서 우리 수군의 전략 적 대응이 경직화되었다. 바꿔 말해, 원균이 인격적으로 부족해서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듯 조정은 늘 당파 싸움에만 골몰하지 않았다. 선조도 최선을 다했고, 비변사도 최선을 다했으며, 이순신도 최선을 다했고, 원균도 최선을 다했 다. 다만 그러한 최선을 추구하는 주체들이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고, 적재적 소에 분배되지 못했으며, 서로 소통되지 못한 결과, 서로의 곡해와 오해로 혹은 사대적인 망상이 조미료가 되어 칠천량의 비극을 가져온 것이었다.
좀 더 성실하게 조정(비변사)의 마음을 읽어주는 수군 장수가 있었으면, 조 금만 더 선조의 고민을 위로할 관료가 있었다면, 좀 더 이순신의 번뇌를 감싸 줄 임금이 있었다면, 좀 더 원균의 선행후지한 적극성을 잘 다독여줄 도원수가 있었다면 하는 것이다. 작은 역량이 모여 국가사회를 만드는 법인데, 우리는 다양한 대한민국에서 오직 하나의 대한민국만 서로에게 강요한 것은 아닐까? 원균과 이순신이 함께 하였던 수많은 승리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이 앞으로 살아야 할 새로운 대한민국에 대한 기대와 비전이 조금은 느껴질 것이다.
함께 노력해서 일궈낸 우리 역사상의 멋진 승리와 신분을 넘고 이해관계를 넘어 얻어낸 황홀한 우리 역사상의 자랑을 다시금 떠올려보자. 임진왜란은 결코 외로운 영웅 한 사람이 이룬 전쟁이 아니었다. 오직 자신만의 편견과 진실 을 위하여 상대를 수단화하고, 역사를 수단화하는 그런 사회가 지속되는 한 원 균에게 가했던 그 수많은 곡필과 날조와 폄훼는 쉬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소통이 없는 사회는 해선 안 될 짓도 정당화되곤 한다. 원균도 작은 퍼즐로 조국의 위기를 막고자 하였고, 이순신도 좀 더 큰 퍼즐로 민족의 동란을 막아냈다. 그런데 아직도 ‘원균 편애론’과 ‘이순신 편애론’을 신주처럼 모시려는 사람들이 서로 한 치도 용인하지 않는다. 서로 편견과 애호에 기초한 과잉해석으로 원균 을 인격적 폄훼의 늪에서 좀처럼 해방시키지 않고 있다. 그런 어리석은 역사 서술이 종교적 신념이 되어 있는 한 그 사회는 진정 소통이 없는 외로운 사회 일 뿐이다.
누군가의 희생이 지속되어야 누군가의 정당성이 만들어지는 사회라면 그 누가 선진국이니 민주국가니 하는 칭송을 받을 수 있겠는가? 부디 패장의 허물 이상으로 원균을 인격적으로 폄훼하거나 모독하지 않길 기대한다. 원균과 이순신은 임진왜란을 이기는데 기여한 일시의 명장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고 나라를 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