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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회 경성대학교 편 - 독일통일의 실상과 우리에게 주는 교훈

2014-09-29 17:05:16   , 2487 조회

written by 4월회

독일통일의 실상과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일 시 : 2012. 11. 12(월) 15:00~17:00
장 소 : 경성대학교
강 연 : 정용길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주 제 : 독일통일의 실상과 우리에게 주는 교훈


I. 독일통일 : 기적에 가까운 일

독일은 1990년 10월 3일에 통일이 되었으니 어느새 통일이 된 지 22년이 되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단된 나라들 가운데 통일이 가장 어려울 것으로 보였던 나라였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 독일은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역사적으로 유럽 정치에 많은 영향을 미쳐 독일 통일에 대한 주변국들의 이해가 일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또한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전범국이자 패전국으로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개 연합국에 의해 분단되었다. 그러므로 독일 통일은 이 4개국의 합의가 없으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까지의 동·서독 관계는 대체로 평화적 공존관계라고 할 만하였지만, 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동·서독이 서로 입장 차이가 컸다. 즉 서독은  ‘1민족 2국가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데 반하여, 동독 정권은 그 동안 두 개의 서로 다른 사회발전 단계를 거쳐 동독에는 사회주의적 민족이, 그리고 서독에는 자본주의적 민족이 탄생하여 민족마저 서로 달라졌다며 ‘2민족 2국가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독일 통일에 대하여 권한과 책임이 있는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소련 4개 승전국들의 입장도 서로 달랐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동독에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독일에서 통일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할 때도 독일인들 중에는 급속한 통일을 매우 회의적으로 본 사람들이 많았다. 동독은 경제 수준에서 아직 서독과 엄청난 차이가 있었고, 또 시장경제체제에 너무 취약하였기 때문에 이 상태에서 통일이 되면 결국 서독은 재정적자와 마르크화의 가치 하락을 맞게 되고, 이로 인해 서독 사람들은 세금증가와 높은 물가고에 허덕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또 동독 사람들 입장에서도 당시의 급속한 통일이란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는 현상인데, 그것 자체가 동독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독일통일은 참으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1989년 5월 동독의 지방선거에서 부정이 있었다며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있자 동독국가보위부는 100명이상의 시위자들을 연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렇게 시작된 개혁의 물결은 동독의 제2도시이자 “혁명의 수도”라고 불리었던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동독의 민주화 운동이나 독일통일과정은 그 결과를 예측하기 매우 어려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충분히 가능했던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동독의 민주화 운동 시위대가 대대적으로 ‘인간 띠 잇기’와 ‘촛불시위’를 하면서도 동독주둔 소련군에 대해 적대행위를 하지도 않았고, 또 “反소련구호”도 없는 등 소련을 자극하지 않았다는 점,
둘째,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때처럼 소련군대가 탱크를 앞세워 동독의 민주화 운동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
셋째, 동독 공산당인 사회주의통일당(SED)이 개혁을 빙자하며 계속 집권하지 않은 점,
넷째, 1990년 8월 23일 동독의 인민의회가 “서독의 기본법 제23조에 따라 동독이 1990년 10월 3일에 서독으로 편입된다는 안”을 가결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은 점,
다섯째,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전후하여 동독 지도부 또는 동독군대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지 않은 점 등이다.
한편 2012년 2월에는 독일이 통일 된지 22년 만에 독일수상과 대통령 모두 동독출신이 되었다.
즉, 헬무트 콜(Helmut Kohl) 전 수상의 ‘정치적 양녀’라는 소리를 들으며 정치에 입문한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은 1998년 총선에서 패배한 후 기민당 사무총장, 당수를 거쳐 2005년 9월에 실시한 제16대 총선에서 승리하여 “독일판 철의 여성수상”이 되었다.
그리고 2012년 2월에는 구 동독 슈타지(Stasi)문서를 관리하는 문서관리청을 이끌었던 동독의 민주화 운동가 겸 개신교 목사인 요아힘 가우크(Joachim Gauck)가 여․야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새 대통령으로 지명됨으로써 앙겔라 수상과 함께 동독출신들이 독일국정을 동반 운영하게 되었다.


II. 통일 전의 동․서독 교류협력수준

1. 서독의 동방정책과 동․서독 정상회담

동‧서독은 분단 후 각기 자신들이 전 독일에서 정통성과 단독대표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동독은 1949년 10월 7일에 제정한 동독헌법에서 “독일국적은 오직 하나이다”라고 명시하였듯이, 그들은 1937년 12월 31일 당시의 독일국경이었던 독일제국을 계승함은 물론 동독이 전 독일을 대표하는 단독대표권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물론 서독도 그들이 독일 땅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Die Ost- und Deutschlandpolitik der Bundesrepublik"이라는 표현처럼 그들의 동방정책(Ostpolitik)과 독일정책(Deutschlandpolitik)을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즉 서독의 동방정책은 소련을 비롯한 동구국가들과의 화해와 협력정책이었고, 독일정책은 대(對)동독정책이었다. 그러나 동방정책은 당연히 동독정책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고, 또 통일문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독일정책속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른바 냉전의 기수였던 서독의 초대수상 아데나워(Konrad Adenauer)는 독일의 통일을 서방측 동맹국들과의 결속을 통한 서독의“힘의 우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보고 서독의 경제재건과 의회민주주의의 실현을 추구하였다. 이것이 서독주도하의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서독인들은 2세들에게 당시의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은 전체독일이 아니고, 그 국민들도 전체 독일민족이 아니다: 독일은 서독보다 그 이상(以上)이다.(Die Bundesrepublik Deutschland ist nicht das ganze Deutschland, ihre Bevoelkerung ist nicht das ganze deutsche Volk: Deutschland ist mehr als die Bundesrepublik.)”라고 하면서 통일의 당위성과 염원을 심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1961년 8월 13일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구축하자 독일의 분단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되어 버렸다. 이것으로 서독은 그들이 지금까지 추구하던 대(對)동독정책에 수정을 가하여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이미 1966년에 미국과 프랑스는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과 긴장완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서독은 동(東)으로 부터는 ‘압력으로서,’ 서(西)로 부터는 ‘방해로서’나타나는 주변 여러 국가들의 데탕트요구에 그들 자신을 조화시켜야 할 입장이 되었다.
이와 같이 동서독이 공존할 수 있는 분위기는 두 가지 다른 요인에 의해 조성되었는데, 하나는 독일의 외적 환경으로서 독일은 헬싱키체제에 의해 분단고착을 강요당했던 일면이 있었던 반면에, 또 다른 공존요인은 독일인 자신들이 스스로 당장 오늘 실현되기 어려운 통일에 집착하기 보다는 분단으로 인한 두 독일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덜어가면서 삶의 질을 높여보려는 실리를 추구한 면이 있었다고 하겠다.
1969년 총선에서 승리한 브란트(Willy Brandt)는 그 해 10월 27일에 ‘사민당-자민당’ 간 새 연립정부의 대(對) 동독 및 대외정책의 계획서를 의회에 제출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서독의 대(對)동독정책에 전향적인 변화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브란트는 독일문제의 해결을 민족 국가적 해결에서 보다는 동맹체제간 균형의 전략 밑에서 긴장완화를 이룩하고 그 다음에 제도화될 수 있는 유럽의 평화질서 속에서 찾고자 하였다.
서독이 이른바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바탕으로 과감한 긴장완화정책을 취하면서 동독에 대하여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자 동독은 결국 ‘2민족 독트린’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1970년 3월 19일에는 독일이 분단된 이래 처음으로 동독의 에어푸르트(Erfurt)에서 브란트 서독수상과 “슈토프”(W. Stoph) 동독수상 간에 최초로 제1차 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5월 21일에는 서독의 카셀(Kassel)에서 제2차 정상회담이 열려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과 유엔동시가입의 발판을 구축하였다.
1987년 9월 7일에는 호네커(Erich Honecker)가 서독을 방문하여 서독의 콜 수상과 정상회담을 하였는데, 흥미로운 일은 당시 75세의 고령이었던 호네커는 독일과 프랑스국경지역 자르브뤼켄 근교의 작은 마을에 있는 그의 고향 집에 살고 있던 당시 69세인 여동생을 만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양독의 정상들은 통일되기까지 8차에 걸친 공식적인 정상회담 이외에도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나 유고슬라비아의 티토(J. Tito), 소련의 안드로포프(J. W. Andropow), 체르넨코(K. Tschernenko) 장례식 그리고 세계경제다보스포럼 등에서 비공식적으로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2. 동․서독 간 각종 교류협력

동독과 서독은 분단직후부터 서로 상대방 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상호간 꾸준히 접촉과 교류를 통하여 분단으로 인한 동‧서독인들의 경제적․사회적 손실을 막고 민족의 이질화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72년 5월 양 독일 간 최초의 국가 간 조약이라고 하는 ‘동서독 일반통행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고, 같은 해 12월 21일에는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동안 동‧서독 간의 교류는 서독정부의 꾸준하고 강력한 교류의지와 동독 측의 호응으로 상당한 수준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서독은 내독교역을 우선 동‧서독 상호 접촉을 위한 매개체로 이용하는 한편, 특히 대 동독 교역에 있어서 서독으로부터 동독을 승인한다는 인상이 배제되도록 노력하였다.
그리고 동독은 서독을 외국으로 지칭하면서 국제법상의 승인을 얻으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면서도 동독은 양 독일 간의 교역을 그들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서독의 대 동독 고립화정책에서 벗어나는 수단으로 이용하려고도 하였다.
동‧서독 교류는 매우 광범위하게 이루어 졌다. 먼저 인적교류는 크게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서독인의 동독여행, 동독인의 서독여행, 서독인의 동독을 경유한 서베를린 왕래, 서베를린 시민들의 동독과 동베를린 여행과 같은 방문 및 관광여행과 동‧서독 청소년들의 수학여행까지 매우 다양하였다.
이러한 여행들로 인한 인적 교류는 기본조약이 발효되자 확실히 증가하여 1973년에 서독인의 동독여행자는 무려 227만 명이나 되었고, 이 숫자는 해마다 늘어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전인 1987년에는 1년에 약 550만 명이나 되었다.
동독당국은 동서독 교통조약이 발효된 날인 1972년 10월 17일에 처음으로 연금수혜자 이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조부모, 부모, 자식 그리고 형제자매들을 ‘긴급한 가족용건’이 있을 때는 서독이나 서베를린에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긴급한 가족용건’으로는 출생, 결혼, 생명이 위독한 병 그리고 사망을 들고 있었다.
한편 동‧서독관계에서 교통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진 이유는 서베를린이 동독 내에 있는 서독으로부터 170km 떨어진 정치적 섬이기 때문이었다. 서베를린은 그 자체로서는 생존이 불가능하고 다만 서독과의 관련 하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서방 3개국도 베를린의 보안과 서방측과의 안전한 접촉에 많은 신경을 썼다. 그러나 사람들의 왕래나 물자의 교역량이 증가하여 서독과 서베를린간의 교통이 점점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자, 벌써 동독은 1951년에 도로사용료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여행자들에게는 세밀한 검사를 하였고, 화물차의 화물도 철저히 검색하여 화물운송이 지연되기도 하였다.
또 1955년 4월 1일에 동독은 갑자기 서베를린과 서독간의 자동차도로 사용에 대한 도로세 징수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동독은 1968년 6월에는 베를린여행에도 여권과 비자를 요구하였고, 비자수수료도 징수하였듯이 동‧서독 간에 갈등이 생길 때마다 종종 교통문제를 서독 측에 압력을 가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독일이 통일되기 전에도 독일인들은 승용차나 기차 그리고 민항기 등 교통수단을 이용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독에서 동독으로 합법적으로 통과할 수 있는 곳도 철도 7곳, 고속도로 5곳, 화물차 전용도로 1곳, 그 밖에 지방도로 등 18곳이 있었다.
또한 서독의 관광객이나 휴가객들이 캠핑을 할 수 있는 장소도 동독 내에 28곳이 있었으며, 또 동독 내에 서독과 서베를린에서 온 방문객들을 위한 호텔도 있었고, 휴가를 보낼 수 있는 곳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분단된 후부터 통일되기 전인 1989년 12월 말까지 동서독에는 62건의 도시 간 자매결연이 맺어 졌고, 또 동독정부의 승인아래 자매결연을 준비하고 있던 도시들도 10곳이나 되었다.
자매결연 상대도시를 선택하는 데에는 역사, 종교, 경제 또는 문화적인 공통성 등이 작용하였다. 예를 들자면 역사적으로 같은 한자동맹 도시였던 뤼베크(Luebeck)는 동독의 비스마(Wismar)와, 서독의 브레멘(Bremen)은 동독의 로스토크(Rostock)와, 같은 박람회 개최도시인 서독의 하노버(Hannover)는 동독의 라이프치히(Leipzig)와 자매결연 하였다. 특히 서독 도시 트리어(Trier)는 마르크스의 고향이기 때문에 동독의 바이마르(Weimar)와, 부퍼탈(Wuppertal)은 엥겔스의 고향이기 때문에 동독의 슈베린(Schwerin)과 자매결연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동‧서독 간에는 1986년 5월에 체결된 문화협정에 의해 문화, 교육, 학술, 문학, 출판물 및 언론인의 교류가 매우 활발하였다. 이와 같이 동‧서독 간에는 서로 의견이 일치하는 것부터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작은 걸음”(Kleine Schritte)의 접근으로 교류와 협력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III. 독일의 통일방법

1. 서독 기본법 제23조와 제146조에 의한 통일

독일인들이 취했던 통일 방법은 서독 기본법 제23조와 제146조에 따른 합병 형식이었다. 즉, 독일은 구체적인 법조문에 따라 통일을 이루었다.
서독 기본법 제23조는 ‘기본법의 효력 범위’를 정하고 있다. 즉 그들은 서독 기본법의 적용 범위로 서베를린을 포함한 당시 서독 11개 주를 나열하고,  ‘독일의 다른 부분에는 그들의 편입 후에 효력이 발생한다.'라고 명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독 기본법 제146조 ‘기본법의 효력 정지’조항에는 ‘독일 민족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 새로운 헌법이 효력을 발생하게 되는 날, 이 기본법은 그 효력을 상실한다.'고 정하고 있었다.
즉 서독 기본법 제23조와 제146조에 근거한 동독의 서독 연방 귀속 방식이란 동독의 집권당이 적당한 시기에 개헌 또는 의회의 결의를 통하여 서독 연방에 귀속하는 결정을 내리고, 동·서독 국민들의 총선에 의해서 새 정부가 구성되고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면 독일은 통일이 된다는 것이었다.

2. 조약 및 협정에 의한 통일

(1) 화폐․경제 및 사회통합을 위한 조약
동·서독은 1990년 5월 18일 서독의 본(Bonn)에서 총 33쪽 38개 조항의  ‘화폐·경제 및 사회통합에 관한 국가 조약’에 조인함으로써 분단 상태를 사실상 마감하고 새로운 단일 경제, 사회체제를 출범시켰다.
경제통합의 주요 내용은 서독의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를 통일독일의 경제체제로 확정하고, 동독에 사유재산제, 자유경쟁, 자유로운 시장가격 등의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동·서독 간에 인력, 자본, 재화, 서비스의 완전 자유 이동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서독은 서독 마르크를 유일한 공식화폐로 정하고, 모든 통화관리는 서독 중앙은행이 맡도록 함으로써 동독 식 중앙 통제적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완전한 통일이 될 때까지 서독 식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전환하여 서독과 통합된 단일 경제권을 형성하도록 하였다.

(2) 선거조약
이 조약의 본래 명칭은 ‘첫 번째 전체 독일 연방의회 총선 준비와 실시를 위한 조약’이다. 이른바 선거조약이라고 부르는 이것을 동·서독은 1990년 8월 3일에 체결하였다. 즉, 독일은 1990년 통일된 지 불과 2개월 만인 12월 2일에 통일 독일의 첫 총선을 실시하였는데, 총선 방법은 바로 동·서독 정부가 통일된 독일의 총선거 실시를 위해 체결한 이 선거조약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이 선거조약은 서독 기본법 제 23조에 의거하여 서독으로 편입되는 동독의 5개 주와 동베를린을 포함한 독일의 전 지역을 공동의 선거구로 하며 과거 256개의 선거구를 328개의 선거구로 확대하였다.
통일 전의 서독 연방의회는 518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통일 후에는 동독 5개 주 의원들이 포함되어 656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일부 주에서 직접 선출된 정원 외의 기독교민주당 후보자들이 이른바 초과의석으로 6명이 당선되어 통일 후 첫 번째 실시한 제12대 연방의회의 실제 의원 수는 662명이었다.
그러나 통일 독일의 정당 및 선거 제도는 통일 전의 서독 제도를 대체로 그대로 수용하였기 때문에 통일 전이나 후에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3) 통일조약
통일조약은 독일통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조약이었다. ‘통일조약’의 정식 명칭은 ‘독일 통일 완수에 관한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 간의 조약’이다. 통일조약은 독일통일이 급물결을 타자 통일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을 예방하고자 하는 동·서독의 공감대 위에서 탄생하였다.
먼저 동독의 드 메지에르는 통일과정 및 통일이후 동독 지역의 이익들을 보장받기 위하여 서독 측에 ‘통일조약’을 위한 회담 개최를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1990년 7월 6일 동베를린에서 제1차 ‘통일조약’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동·서독 간의 ‘통일조약’협상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분단 이후 서로 상이한 이념과 체제하에서 살아왔던 동·서독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일시에 하나로 통합시킨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통일 독일의 수도 문제, 재산권 문제, 낙태 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몇 가지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1990년 8월 31일 동·서독은 세 차례의 회담을 거쳐 ‘통일조약’에 서명하였다. 물론 동·서독 간의 모든 입장 차이가 극복된 것은 아니었다. 해결되지 못한 쟁점 사항들에 대해서는 새로운 법률이 제정될 때까지 서독 지역에서는 서독의 법을, 동독 지역에서는 동독의 법을 적용하기로 합의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언제 합의될지도 모르는 지루한 논쟁으로 인해 통일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경우 자칫 통일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는 독일인들의 위기의식이 반영된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4) ‘2 + 4’ 조약
독일의 통일논의가 활발해 지자 동·서독 외무장관들은 1990년 3월 14일 캐나다의 오타와에서 회담을 갖고 ‘2+4회담’을 열기로 합의하여, 5월 5일에 서독의 본에서 첫 번째 외무장관급 ‘2+4회담’이 공식적으로 열렸다.
독일통일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도출해 내기 위한 ‘2+4회담’에서는 첫째, 통 독일과 폴란드와의 국경문제, 둘째, 통일독일에서의 제2차 대전 전승 4개국의 법적 지위문제, 셋째, 통일 후의 미·소 양국 군 철수문제, 넷째, 통일 독일의 군사적 지위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물론 소련을 비롯한 주변국들은 처음에는 독일이 통일되어 강력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반대 입장을 취하거나, 독일통일은 유럽이 통합된 이후에나 가능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베를린, 파리에서 ‘2+4회담’이 계속 열리고 서독의 콜 수상과 겐셔 외무장관 등이 열심히 통일외교를 펼쳐 분위기는 통일 쪽으로 바뀌어 갔다.
즉 1990년의 독일통일은 과거 비스마르크(Bismarck)식의 강력한 군사력이나 외교술에 의한 통일이 아니고, 주민들의 민주적 의사에 의한 평화적 방법으로의 통일이었기 때문에 과거와는 달리 독일의 팽창의지는 없었으며, 또 이제는 유럽안보 협력회의(CSCE)나 NATO와 같이 집단안보체제 속에서 안보문제를 구상하기 때문에 통일된 독일도 주변국들과 공존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내다보아 연합국들과 주변국들은 독일통일을 인정하게 되었다.
결국 1990년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제4차 ‘2+4회담’에서 독일통일에 대한 기본골격이 합의되었다. 그 내용은 첫째, 통일독일은 NATO의 정회원국 지위를 갖고, 둘째, 영토는 현재의 동‧서독 영토로 국한하며, 셋째, 군 병력은 37만 이하로 유지하고, 넷째, 핵이나 화생방무기를 생산하거나 보유하지 않기로 하며, 마지막으로 동독주둔 소련군의 철수비용 76억 달러는 서독측이 지불한다는 것이었다.
독일은 관련 국가들이 “독일에 관한 최종 합의협정”에 조인함으로써 독일통일에 대한 국제적인 합의까지 도출해 내었다. ‘2+4협정’은 독일통일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IV. 독일통일의 3박자

분단국이 통일을 하는 데는 첫째, 통일 당사국의 국내 정치․경제적 상황, 둘째, 통일을 하려는 국가 간의 교류와 협력관계, 그리고 셋째, 통일을 하려는 나라의 주변국과 국제적 관계가 통일에 긍정적으로 작용을 해야 한다.
첫 번째로 통일 당시 동독과 서독의 국내 정치․경제상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동독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독에서는 이미 1953년 6월에 지나친 중공업 우선정책과 건설노동자의 노동기준량을 높인 것이 원인이 되어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었다. 또 1977년 10월에는 “독일 민주주의적 공산주의자동맹”이라는 조직이 결성되어 동독의 개혁을 요구하였다.
또한 동독에는 이른바 반체제 인사로 소설가인 스테판 하임(Stefan Heym)과 물리학자 로베르트 하베만(Robert Havemann) 등 동독의 문필가와 예술인, 학자, 교회 그리고 재야단체가 꾸준히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었다.
이러한 체제개혁의 경험은 대외적으로 탈냉전의 분위기와 대내적으로 체제불만의 기운이 성숙되면서 1989년에 이르러 동독의 평화적 혁명으로 귀착되었다.
즉 동독의 개혁운동은 고르바초프(Gorbachev)의 개혁‧개방정책에 영향을 받아 오래 전부터 탈(脫) 스탈린주의를 선언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다당제를 표방했던 헝가리와 폴란드의 개혁분위기에 고무되어 1989년 여름부터 절정에 이르기 시작 하였다.
동독의 개혁운동은 1989년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던 라이프치히 월요시위의 진원지인 니콜라이교회를 모태로 하여 동독의 11개 지역대표 30명에 의해 결성된 재야단체인 신광장(Das Neue Forum)에 의해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개혁운동은 동독의 여러 도시에서 여행의 자유, 표현의 자유, 경제제도의 개혁 그리고 자유총선거를 요구하면서 대규모 평화적인 시위로 확산되었다. 때마침 동독인들의 서독으로의 탈출이 대규모로 시작되면서 동독정권은 동독인들의 개혁요구를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즉, 1989년 10월 4일에는 체코의 프라하로부터 약 1,400여명의 동독인 들이 특별열차편으로 서독으로 이주할 수 있게 되었고, 10월 18일에는 1971년 5월부터 동독을 통치했던 호네커가 결국 축출되고 크렌츠(Egon Krenz)가 동독의 새 지도자가 되었다. 11월 7일에는 동독내각이 총사퇴하였고, 11월 8일에는 동독 최고결정기구인 정치국을 개혁파 인사들로 전면 개편하고 개혁파의 기수로 알려진 모드로우(Hans Modrow)를 새 내각의 수상으로 지명하였다.
이와 같이 동독내의 정치상황이 급변하는 가운데, 11월 9일에는 전후사의 최대사건이라고 불리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일이 벌어졌다.
베를린 장벽이 헐린 다음날인 11월 10일 동독공산당 중앙위는 자유선거 실시, 모든 여행규제의 영구철폐, 경제정책 전환 그리고 보안대에 대한 의회의 감시 등 개혁계획을 발표함으로써 동독주민들의 개혁요구를 대대적으로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1989년 11월 28일 서독의 콜 수상이 독일통일을 위한‘10개항 프로그램’을 제의하자 동독의 모드로우 수상도 1990년 2월 1일 ‘하나의 조국, 독일을 위한 4단계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한편 동독공산당은 12월 16일부터 열린 제2차 긴급 특별대회에서 당 이름을 “민주사회주의당”(Partei des Demokratischen Sozialismus)으로 바꾸었다.
동독개혁운동의 결과로 동독에서는 40년 만에 처음으로 ‘통일을 묻는 국민 투표’라고까지 불리어졌던 자유총선거가 1990년 3월 18일 총 1238만 명의 유권자들 가운데 93.22%의 투표율을 보이며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기민당이 중심이 된 독일연합(AD)이 승리하였다. 그러나 독일연합은 총400석의 동독의회 의석 가운데 과반수 의석에 미치지 못하는 193석을 차지하여 결국 사회민주당(SPD)과 대연정을 하기로 합의하고, 4월 5일에 역사적인 의회 개원식을 가졌다.
동독의회는 새 국가의 출범을 선포하는 한편, 총선결과 제1당이 된 동독 기민당의 당수였던“로타 드 메지에르”(Lothar de Maiziere)를 비(非) 공산연립정부의 수상으로 선출하였다. 동독과 서독의 집권당이 모두 기민당이 됨으로써 양 독일의 집권당은 통일이 된 것이다. 이 선거가 끝난 후 채 7개월도 되지 않아서 독일이 통일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3.18총선은 정말 ‘통일을 묻는 국민투표’의 역할을 톡톡히 해 낸 것이다.
또한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1990년 8월 23일은 동독인민의회가 독일의 통일문제를 결정한 매우 의미 있는 날이었다. 그 날 동독인민의회는 동독이 서독의 기본법 제23조에 따라 1990년 10월 3일에 서독에 편입되는 안건을 오랜 토론 끝에 찬성 294표, 반대 62표, 기권 7표로 가결시켰다. 그로 인해 독일은 평화적으로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한편 당시 서독의 국내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서독의 초대 수상이었던 아데나워는 독일의 통일은 서독의“힘의 우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서독이 군사적․경제적으로 동독보다 우월하고 또 정치적으로도 의회민주주의를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을 추구하였다. 이로 인해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정치적으로도 선진적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 될 당시도 서독은 동독주민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경제부국이었다. “서독 마르크여 오라. 오지 않으면 우리가 간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이와 같이 서독의 경제력은 막강하였고, 그러면서도 경제적 약자를 위한 사회복지정책이 상당히 높았던 민주복지국가였다. 이것이 동독인들로 하여금 선거를 통하여 자유의사로 그들의 사회주의국가 동독을 포기하고 서독을 선택하게 한 것이다. 이것이 독일통일의 발판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두 번째로 통일을 할 당시의 동․서독관계는 분단되어 있으면서도 통일된 효과를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관계였다.
동․서독은 1951년에 체결한 “베를린 협약”을 기초로 교류를 시작하였다. 1970년에 제1차 동․서독 정상회담이 열렸고, 1972년에 동․서독기본조약이 체결되었다. 동․서독은 그 동안 꾸준히 교류와 협력을 하여 상당한 수준의 협력관계가 이루어 졌다.
또한 동․서독과 남․북한 간 통일문제를 비교할 때,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지표가 있다. 즉 독일은 연합국 4개국에 의해 분할되었다. 그런데 미국, 영국, 프랑스 서방 3개국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은 하나로 통합되어 서독이 되었고, 소련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은 동독이 되었다.
그러므로 약간 차이가 있지만 동독은 독일 전체지역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였고, 인구도 통일 당시 서독은 6000만 명이 좀 넘었으나 동독은 1600만 명 정도로 동독의 인구비율은 서독의 약 4분의 1이었다. 2008년 독일 인구는 약 8200만 명인데, 그 가운데 약 20.1%인 1650만 명 정도가 동독에 살고 있다.
세 번째로 독일통일과 주변 환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독일은 지리적으로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9개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유럽의 역사와 끊임없이 밀접한 관련을 맺어 왔다. 그래서 독일은 ‘유럽의 심장‘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독일과 유럽의 지리적, 역사적 요소를 모두 함축성 있게 표현한 말이다. 유럽대륙에서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대두될 때마다 독일문제는 제기되었다.
따라서 독일의 분단은 유럽대륙의 질서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이런 이유로 독일의 통일 또한 단순히 둘로 나누어진 국가가 하나가 되는 것이기 보다는 유럽대륙의 질서가 재편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전체의 통합을 유도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었다. 독일과 유럽은 ‘운명공동체’라는 표현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공동 유럽의 집’구상도 그리고 유럽연방 또는 유럽합중국을 목표로 통합을 시도하던 유럽공동체(EC)와 오늘날의 유럽연합(EU)도 모두 독일통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급격히 동·서독 관계에 큰 변화가 일어나자 서독의 콜 수상은 독일 통일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소련과 미국을 방문하여 이른바 통일외교를 전개하였다.
그는 1990년 2월 10일과 11일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독일 통일 문제를 중점적으로 논의하면서 ‘독일이 통일되어야 유럽통합과 유럽평화가 가능하고, 독일이 분단되어 있으면 유럽은 통합되기 어렵고 그러면 평화도 어렵다’는 논리를 폈다.
또 같은 달 24일과 25일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부시(George Bush) 대통령과 역시 독일 통일 방안과 동서 관계 및 군축 방안 등에 관하여 회담을 하였다.
때마침 유럽은 통합의 분위기였다. 독일은 유럽통합의 분위기에 잘 편승하여 통일을 이루었다. 독일통일 후 유럽연합은 점차 확대되었고, 지금은 동유럽 국가들을 대부분 수용하여 유럽연합은 현재 27개 회원국이 되었다. 콜 수상이 그의 ‘10개항 프로그램’에서 ‘독일의 미래설계는 유럽의 미래설계에 따르겠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 유럽통합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며 독일은 통일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V. 우리에게 주는 교훈
 
한국은 독일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한국의 북방정책(Northpolitik)은 서독의 동방정책(Ostpolitik)에서, 남북한기본합의서는 동서독기본조약에서, 그리고 한국의 통일부는 서독의 내독성을 참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독일통일은 통일을 염원하는 한반도에 값진 교훈을 주고 있다. 한반도는 독일로 부터 분단고통의 완화를 위한 방법은 물론, 궁극적으로 통일의 방법과 지혜도 얻을 수 있다. 한반도에 주는 몇 가지 시사점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독일통일이 한반도에 주는 시사점은 통일 이전에 동서독이 실천하였던 분단관리체제로부터 얻을 수 있다. 분단구조 하에서 동서독관계의 원칙은 교류와 협력을 통한 상호공존이었다. 그것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독일통일은 독일 사람들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루어 낼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처음부터 가능성이 없는 통일보다는 “분단되어 있으면서도 통일된 효과를 누리자”는 전략이었다.
그 첫 걸음으로 그들은 편지와 전화를 할 수 있었음은 물론 서로 왕래도 하였고, 상대방의 TV를 시청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서독은 내독성 산하에 전독연구소를 설치하여 동독에 관해서는 물론 동‧서독관계에 대해서도 상당한 연구실적을 쌓아 놓고 있었다.
바로 이와 같은 동‧서독의 상대방을 바로 알기 위한 노력들이 결국에는 평화적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물론 통일 후에 보니 서독이 알고 있었던 동독의 실상과 현실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또한 그들은 현실을 무시한 맹목적인 통일지상주의를 배격하고, 내실 있는 교류와 협력에 주력하였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팽배했던 냉전시기에도 그들은 정치적인 일들로 인해 영향을 받지 않도록 노력하며 인적∙물적 교류에 힘썼다.
동‧서독간의 교류 가운데 상업적 교역이나 물품거래 등에서는 대부분 동독 쪽에 더 유리하였지만 서독은 이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크게 독일문제의 해결로 생각한 것이 교류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동독 또한 서독의 배려에 일정한 답례를 보냈다는 것이 한반도문제와 비교하여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남북한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렀을 뿐만 아니라, 계속 긴장과 갈등이 이어져 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동독처럼 민주화되지도 않았고, 또 한국도 아직 서독의 수준만하지 못하다
둘째, 독일통일의 과정과 방법이 한반도에 주는 시사점도 매우 크다. 독일통일은 조약과 협정에 의한 평화적 통일이다. 동독은 서독 기본법 제23조와 제146조에 의한 통일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화폐․경제 및 사회통합에 관한 국가조약“을 비롯하여 선거조약과 통일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통일을 하기 위해 동‧서독 간 풀어야 할 문제들을 대체로 조약과 협정으로 해결하였다.
서독의 콜 수상은 동유럽에 민주화․자유화의 바람이 불고, 동독에서도 개혁운동이 활발해 지면서 베를린 장벽이 철거되자 독일통일을 위한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고르바초프, 부시, 대처 그리고 미테랑과 회담을 하며 통일외교를 폈다. 때마침 유럽이 통합하려는 분위기가 고조될 때였기에 콜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서독은 유럽의 강대국들 중 하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독일은 유럽에서 힘의 균형이 깨어질 때 독일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었다. 1871년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할 때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프랑스의 힘이 약화된 시기였고, 1990년 콜 수상이 독일을 통일할 때에도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실각이 점쳐질 만큼 혼란한 시기였다. 1871년의 비스마르크는 군사력과 외교력으로, 그리고 1990년의 콜은 경제력과 외교력으로 통일을 실현하였다.
이 상황도 한반도에 주는 함의는 매우 크다. 한반도 통일은 우리 민족내부의 문제와 주변국들의 이해가 얽힌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현재 남한이나 북한 모두 독일통일 당시 서독이 주변 강대국들을 설득하여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던 만큼의 영향력을 주변국들에게 행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셋째, 독일과 한반도 문제에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분단 당사국들이 상대방과 전쟁을 치렀던 역사적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도 중요하다. 분단 이후 동․서독 상호간에는 무력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던 반면에, 한반도에서는 남북한 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또한 동‧서독은 1951년의‘베를린 협약’을 기초로 교류를 시작하여 1990년에 통일이 이루어 졌으니, 교류를 시작한지 약 40년 만에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고, 1970년에 제1차 정상회담이 있었으니 정상회담 후 20년 만에 통일이 된 것이며, 또 1972년에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되었으니 조약체결이후 18여년 만에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통일은 이와 전혀 무관 할 수 있다. 다만 전쟁과 같은 물리적인 힘에 의한 통일이 아니고,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의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교류와 협력을 한 기간과 수준이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독일통일은 통일의 당사자들인 동독이 민주화 운동을 통해 평화적 혁명이라고 불리 울 만큼 개혁되었고, 서독은 동독주민들이 부러워할 만큼 질 높은 민주복지국가이었다. 그리고 이 두 나라는 꾸준히 교류와 협력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통일에 권한과 책임을 갖고 있었던 미․영․프․소 4대 강국과 주변국들은 그동안 독일이 보여 준 전쟁책임에 대한 속죄의 모습과 유럽통합을 위한 자발적 헌신의 자세를 보면서 독일통일을 지지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독일의 통일은 이루어 질 수 있었다.
즉, 분단국이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통일을 하는 당사자들의 통일열망과 두 나라간의 관계, 그리고 주변국들과 당시 국제환경의 3박자가 맞아야 가능하다는 것이 독일통일이 한반도 통일에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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