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Search
뒤로

캠퍼스투어

글쓰기

23회 원광대학교 편 - 콜럼버스와 서구중심주의

2014-09-29 16:15:49   , 2676 조회

written by 4월회

콜럼버스와 서구중심주의


일 시 : 2012. 10. 29(월) 11:00~13:00
장 소 : 원광대학교
강 연 : 송기도 전북대학교 교수
주 제 : 콜럼버스와 서구중심주의


1.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

유럽인들이 황금이 그득할 것으로 생각되는 칸의 나라, 아시아를 가기 위해서 중동지역을 거쳐 가야했다. 그러나 실크로드나 스파이스 로드의 출발지가 이슬람세력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었으며, 15세기 들어서는 기독교인들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결국 황금의 땅인 중국이나 인도의 칸의 제국을 가기위해서 유럽은 새로운 루트를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1492년 지구가 둥글다는 확신을 가진 콜럼버스는 인도(아시아)로 가기 위해 동쪽이 아닌 서쪽을 향해 항해를 떠났다. 1492년 이슬람세력과의 국토회복전쟁에서 승리한 에스파냐 왕국 이사벨(Isabel)여왕의 지원을 받은 콜럼버스는 3척의 배(Santa María, Pinta, Niña)에 약 90명의 선원을 태우고 마르코 폴로가 얘기했던 황금의 나라 Catay(중국)나 Chipango(일본)를 향해 지구를 거꾸로 돌아가는 미지의 여행을 떠나기 위해 스페인 남부 팔로스(Palos)항을 출발했다.
인도의 칸(국왕)에게 바치는 이사벨여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항해를 시작한지 61일 만인 10월 12일 콜럼버스는 한 섬에 도착했다. 원주민들이 ‘과나하니’라고 부르는 섬이었는데, 콜럼버스는 그 곳을 ‘San Salvador(구세주)’라고 이름 붙였다. 두말할 필요 없이 두 달간의 항해 끝에 목숨을 구원받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이름이었으리라. 북쪽의 보다 큰 섬인 Hispanola섬에 Navidad(성탄절)이라는 성채를 지어 일부선원을 남겨두고 2척의 배로 귀국했다. 이는 아메리카에 세워진 최초의 유럽 거점 지였다. 산타 마리아 호가 부서지는 바람에 두 척의 배로 본국을 향해 다시 대서양을 건너가던 콜럼버스는 대서양 중간에 위치한 포르투갈령 Azores군도에 기착했다 다시 한척의 배를 잃고, 마지막 남은 니냐호에 의지해 겨우 스페인으로 향했다. 1943년 4월 아메리카에서 수집한 소량의 금과 원주민을 데리고 당시 스페인의 왕궁이 있던 바르셀로나(Barcelona)로 돌아왔다. 개선장군이 된 콜럼버스는 스페인 왕실의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그 후 3차례 더 인도를 여행한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도착한 곳이 인도라고 생각하였다. 1498년 세 번째 여행에서는 남미 북부를 거쳐 돌아왔는데 아메리코 베스푸치(Americo Vespuccio)가 동행했다. 그리고 그는 이곳이 콜럼버스의 주장처럼 인도가 아니고 새로운 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도 그곳 사람들을 ‘인디언’이라고 부르며,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교육받아 왔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했을까? 콜럼버스 이전에는 정말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에 대해 아무도 몰랐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콜럼버스보다 5백여 년이나 앞선 984년 바이킹족인 에릭(Erik the Red)은 법을 피해 북쪽에 있는 섬으로 도피했다. 흰 눈으로 덥혀있는 그곳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린란드(Greenland)라고 명명했으나, 농경지가 부족하고 추위로 인해 오래 머물지 못했다. 1000년 경 에릭의 아들인 에릭슨(Leif Eriksson)은 보다 나은 땅을 찾아 北아메리카에 도착해 식민지를 건설하고 빈랜드(Vinland 포도의 땅)라고 이름 지었다. 이 같은 사실은 1980년대 미국 북동부와 캐나다 동부지역에서 바이킹의 유적들이 발견됨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이들의 접촉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들 바이킹족은 북아메리카에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식민지를 건설하지 않았으며, 1400년경에는 그린란드와 새로 발견된 지역과의 연결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완전히 끊어 졌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콜럼버스는 항해를 떠나기 전 서쪽으로 한 달 정도 배를 타고가면 육지에 도착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2.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콜럼버스와 신대륙발견
1997년 미국의 월간 라이프(Life)지는 <지난 1천년을 만들어낸 1백대 사건과 1백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예수탄생이후 두 번째 천년의 최대사건은 1455년 독일 대장장이 구텐베르크(Gutenberg)가 금속활자로 성경을 인쇄한 일이다. 귀족과 성직자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은 그의 인쇄기를 통해 일반에 퍼져나갔으며, 이후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산업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콜럼버스의 모험은 두 번째 사건으로 신대륙의 발견은 원주민 학살과 금광러시, 노예무역으로 이어지면서 유럽의 세계지배를 공고히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사건은 1517년 면죄부 판매 등 교황청의 정책을 비난하고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영성을 강조하다 파문당한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이었다.
세계 최고의 인물은 전기를 발명한 에디슨이 차지했으며, 2위는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였다. 그리고 3위는 종교개혁을 이끈 루터가 차지했다.
백인들 중심의 선정이지만 1백대 사건과 인물에서 콜럼버스는 모두 2위를 차지했다. 실질적으로 최근 1천년의 최고의 사건과 인물은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인물과 사건에서 3위를 차지한 것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었다. 최고의 인물로 선정된 에디슨은 1백대사건의 11위에 들었으며, 구텐베르크는 1백대 인물에도 선정되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콜럼버스의 불분명한 국적을 놓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서로 자기들의 선조라고 다툼을 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콜럼버스가 스페인을 일약 세계 최강국의 지위에 올려놓았으며, 이는 동시에 유럽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게 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1969년 달에 첫발을 내디딘 암스트롱의 업적이 콜럼버스와 비견되기도 하지만, 콜럼버스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아도 닐 암스트롱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1992년 유럽, 특히 스페인은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 5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바르셀로나에서 하계올림픽을 성대히 치러냈으며, 세빌야에서 세계만국박람회를 개최했다. 또한 무수히 많은 기념사업들이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콜럼버스와 관계가 있는 스페인, 이탈리아, 미국, 라틴아메리카 국가 등 여러 나라에서 벌어졌다.
10월 12일은 스페인과 미국을 포함한 아메리카 대륙의 모든 국가들에서 국경일로 지정되어있다. 따라서 1992년 10월 12일 ‘신대륙발견 500주년 기념일’에는 당시의 항해로를 따라 스페인을 출발한 범선들이 뉴욕 항에 입항했으며, 이를 기념하고 축하하는 대대적인 행사가 벌여졌다. 물론 이 같은 행사는 매년 치러지는 것이지만 500주년이 갖는 의미는 더욱 각별한 것일 수 있겠다. 유럽인들의 미래를 확실하게 보장해줬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후 그 어떤 유럽인도 콜럼버스의 발견을 능가하는 기여를 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인디오의 후예들은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도착이 유럽인들의 무지한 만행에 의해 그들의 땅과 종족을 산산조각내고 유린하고 수탈한 역사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를 반성하고 엄숙히 기념하는 500주년의 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로 다른 두 세계의 만남이 이토록 너무나 다른 결과를 낳고만 셈이다. 

3. Tordesillas 조약: 세계최초의 제국주의 조약
콜럼버스가 바르셀로나로 귀환해 대서양을 통한 인도항로를 발견하고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주장을 하자 당시 해양제국이었던 포르투갈은 곧바로 이의를 제기하였다. 콜럼버스가 다녀온 곳은 대서양 중간에 위치한 자신의 영토인 마데이라(Islas Madeiras)군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포르투갈의 영토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발생한 양국 간 영토분쟁은 1493년 당시 교황인 Alexander 6세의 중재안인 <교황칙령>으로 타협을 보는 듯했다. 대서양 포르투갈령인 Cabo Verde로부터 서쪽으로 100리그를 가서 그곳부터 서쪽은 스페인령, 동쪽은 포르투갈령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왕실은 스페인 출신인 교황이 스페인에게 지나치게 유리하게 판정을 했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약 1년간에 걸친 협상 끝에 1494년 6월 7일 지구를 양분하여 서로의 영역을 정한 또르데실야스(Tordesillas)조약을 체결함으로서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이 조약은 대서양의 까보 베르데(Cabo Verde)로부터 서쪽으로 370리그(1100마일)를 가서 남북으로 직선을 그어 양국 간 분계선으로 정하고, 분계선으로부터 동쪽의 땅은 포르투갈령 그리고 서쪽의 땅은  스페인령으로 정했다. 이에 따라 당시 아직 그 존재가 알려지지도 않았던 브라질의 동부지역이 자연스럽게 포르투갈의 영토로 미리 정해지는 결과가 되었다. 1500년 포르투갈의 Pedro Alvares  Cabral이 남미의 브라질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미 6년 전 스페인과 조약에 의해 그 땅은 이미 포르투갈령이었다.


이는 세계 최초의 제국주의적 조약으로 신세계를 <주인 없는 땅>으로 간주하고 이의 정복을 정당화 한 것이다. 해당 지역 주민의 존재와 의사는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고 강대국들 간의 이해에 따라 이루어진 제국주의적 조약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이러한 조약에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는 “태초에 아담과 이브의 유언장에 발견된 미지의 땅이 모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땅이라는 말이 있었는가?”라며 항의했다.

4. 아메리카 인디언에 관한 대논쟁
콜럼버스가 인도에 다녀온 후 아메리카는 ‘신이 유럽인에게 준 선물’이었다. 인디언은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이 아니었다. 인디언들을 살육하고 재산을 약탈했으며 광산에서 혹사시켰다. 또 일부는 유럽으로 끌려와 서커스단의 동물처럼 취급받았다. 인디언들은 동물과 다름없었다.
Conquistadores(정복자)들의 살육과 만행은 아메리카 정복에 동행했던 사제들의 비판을 받았다. 최초의 사제였던 데 라스 까사스(Bartolome de las Casas)신부는 교황청과 스페인 왕실에 인디언의 보호를 탄원했다. 
 천년을 넘게 하느님을 찬미한 유럽인들은 1550년 인디언이 그들과 같은 인간인지 아닌지를 놓고 대논쟁을 벌였다. 천년동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온 유럽인들에게 이들은 아담과 이브의 자손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국왕인 카를로스 5세(Carlos 5세)는 당시 왕궁이 있던 바야돌리드(Valladolid)의 산 그레고리오(San Gregorio)수도원에서 인디언의 존재에 관한 논쟁을 하도록 했다. 
신학자 세풀베다(Juan Gines de Cepulveda)와 신대륙 최초의 사제였던 데 라스 까사스 신부간의 바야돌리드(Valladolid)대논쟁과 그리고 4명의 성직자와 11명의 법학자로 구성된 15인 위원회가 두 사람의 논쟁을 최종 판결하기 위해 참석했다. 결국 교황청의 중재 하에 “인디오는 인간이다”로 결론 내려졌다. 따라서 이들(인간)에게 동물에게 하듯이 폭력적인 통치를 하면 안되었다. 그리고 교황청은 신대륙에서 노동을 위해 아프리카의 흑인을 노예로 착취하는 것을 허용했다.

5. 신대륙 발견과 그 결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세계는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유럽인들에게는 지리적으로 세계가 엄청나게 더 넓어졌으며, 지난 1000년 동안의 중세적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아메리카의 ‘발견’과 정복은 정치적, 경제적, 인종적, 종교적 측면 등 모든 면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정치적으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서유럽 해양 국가들이 중부 유럽 국가들을 제압하고 세계 강대국으로 등장했다. 특히 스페인은 지난 700여 년간에 걸친 이슬람세력(무어족)과의 국토회복전쟁(Reconquistas)을 성공리에 마치면서 민족국가의 틀을 완성하고 유럽 최강국으로 탈바꿈하였으며,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바탕으로 이후 150여 년간의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무적함대’를 자랑하던 스페인의 필립 2세의 “나의 제국에는 해질 날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아시아의 필리핀은 필립 2세의 이름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포르투갈의 왕위까지 계승한 필립2세 치하의 영토는 아메리카의 모든 영토와 태평양의 많은 섬들, 아시아의 일부 식민지들, 아프리카 곳곳의 식민지들, 그리고 유럽의 일부 지역 등 전 세계에 걸쳐 있었다. 그러니 실제로 스페인 제국의 영토에는 항시 해가 떠있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주요한 변화가 있었다.
첫째, 무역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갔다. 신대륙의 등장으로 과거 지중해 중심의 무역이 쇠퇴해진 반면,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아메리카와 유럽국가간의 교역이 점차 활발해졌다. 즉 신대륙에서 수탈한 엄청난 양의 상품과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보내지는 상품의 교역이 시간이 지나면서 큰 폭으로 증대되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대서양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우리사회에서는 ‘태평양시대’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는 태평양을 사이에 둔 미국, 캐나다, 멕시코, 칠레 등 아메리카 국가들과 일본, 한국, 중국, 호주 등 아시아 대륙의 국가들 사이에 거래되는 상품의 교역량이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아메리카 미국, 캐나다, 멕시코,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와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국가들 간의 교역량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둘째, 세계 무역이 급증하고 농업이 급진적으로 발전했다. 초기에는 금, 은 등 신대륙에서 지하자원 수탈이 주로 이뤄졌지만, 18, 19세기부터 사탕수수, 커피, 고무 등의 대단위 경작이 이루어졌다. 감자, 옥수수, 담배, 코코아 등 신대륙으로부터 새로운 농작물 종자가 유럽으로 유입됨으로서 유럽에서는 농업 생산이 증대되었고, 이는 후일 유럽의 인구 증가를 가져오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늘어나는 인구를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는 식량공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셋째, 신대륙으로부터 특히 지금의 멕시코와 페루로부터 대량의 금과 은이 유입되어 초기 유럽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신대륙발견이후 처음 100년 동안 약 16만 킬로그램의 금이 수탈되어 유럽으로 보내졌다. 또 처음 150년간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보내진 은의 양은 무려 1,600만 킬로그램에 달했다. 이는 1980년 현재 소련을 제외한 전체유럽의 1년간 금생산량인 약 1,400 킬로그램의 115배에 해당하는 것이며, 1년간 은 생산량 약 130만 킬로그램의 13배에 해당하는 양이다. ‘자본주의’ 성장의 핵은 두말한 필요 없이 ‘자본’의 축적이다. 16세기 들어서면서 유럽에는 암흑의 중세 천년이 끝나고 근대 민족국가의 태동과 더불어서 자본주의가 발아하기 시작했다. 이때 자본의 축적을 가능케 했던 것은 이들 신대륙으로부터 약탈해온 엄청난 금과 은이었다.
인종적인 면에서는, 전쟁, 질병, 학살, 과로 등으로 인디오 인구가 급감했다. 콜럼버스가 도착했을 때 약 5천만-1억 명의 인디오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됐던 인구가 100년 후 10분의 1로 감소했다. 이처럼 엄청난 수의 인구 감소는 스페인 정복자들의 상상을 불허하는 만행과 학살에도 기인한 바가 크지만 유럽에서 가져온 홍역, 장티푸스 등 질병에 의한 사망과 금은의 채취를 위해 강제 노동에 인디오들이 끌려가면서 가정이 해체된 탓도 크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인륜을 넘어서는 만행을 고발한 데 라스 까사스(Bartolomé de las Casas)신부는 인디언을 보호할 것을 주장했고 이에 스페인 왕실은 1550년 바야돌리드에서 인디언의 존재에 대한 대논쟁을 열었다. 그리고 인디언 보호법(Ley de Indias)을 제정하기에 이르렀으며, 이에 따라 인디언에 대해 어느 정도 보호를 할 수 있게 됐지만 스페인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결과적으로 신대륙에서 일할 수 있는 노동력의 상실을 의미했다. 따라서 인디언의 노동력을 대신할 방법으로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끌어오게 하였다.
신대륙으로 많은 유럽인들이 이동한 결과 인종간의 혼혈이 이루어졌다. 아메리카에는 몽골계통의 북아시아 인종 등 다양한 종족들이 수만년 전부터 이주해 살고 있었다. 그 후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도착이후 백인들이 들어왔고, 그리고 신대륙에서 흑인들의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흑인을 데려왔으니 지구상의 세 인종이 모두 모여 살게 된 셈이다. 흔히 미국사회를 얘기하면서 ‘인종전시장’이니 ‘인종의 도가니’니 하는 표현을 쓰지만, 이는 정작 중남미에 더 잘 어울리는 설명이다. 그렇게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살다보니, 혼혈 역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메스티소, 물라또, 잠보 등의 혼혈 인종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백인들은 유럽과 비슷한 기후조건을 가진 온대지역(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코스타리카 등)에 거주했으며, 원주민은 멕시코 고원(Aztecas)과 안데스 고원(Incas)을 중심으로 고산지역에 살았다. 그리고 아프리카 열대지방에서 끌려온 흑인들은 카리브의 해안지역과 도서지역에 살며 플랜테이션 농장에 거주했다.
결과적으로 신대륙에서 백인, 원주민, 흑인 3인종의 혼혈이 만들어졌다. 백인과 원주민(인디오)사이에서 메스티조(mestizos; 스페인어로 혼혈이라는 뜻)가 태어났고, 백인과 흑인사이에서 물라또(mulatos), 그리고 원주민과 흑인사이에서 잠보(zambos)가 태어났다. 이들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메스티조라고 하기도 한다. 사실 지난 수백 년간 이들 사이에서 피가 수십 수백 번도 더 섞였을 터인데 더 이상의 세밀한 분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특히 유럽에서 정치적 박해가 있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던 시기에는 신대륙으로 인구의 대량 이주가 이루어졌다.



종교적인 면에서는, 가톨릭 세계가 확장되었다. 16세기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 등이 이룬 종교개혁으로 유럽에서는 기독교가 구교(catholics)와 신교(protestants)로 양분되었는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중남미는 완전히 가톨릭 일색이 되었다. 또한 가톨릭을 국교로 한 스페인의 종교정책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톨릭이 교육에 많은 공헌을 하게 하였다. 이는 지금까지도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교육기관이 가톨릭과 연계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중남미국가에는 수많은 가톨릭 계통의 중등학교가 있으며, 고등교육을 담당하는 대학에도 가톨릭대학(Universidad Catolica)이 있다. 이는 그만큼 가톨릭의 영향력이 크다는 한 예이다. 그리고 중남미 지역에서 가톨릭 정당의 영향력도 막강하며, 아르헨티나의 경우는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가톨릭신자이어야 한다. 물론 멕시코, 콜롬비아, 칠레 등과 같이 헌법에 교회는 정치에 개입할 수 없게 되어있지만 20세기 초반까지도 교회의 개입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보수당과 교회의 정치개입을 철저히 반대하는 자유당과의 대립이 심했다. 
현재 4억5000만 인구의 중남미는 수적으로 가장 많은 로마 가톨릭신자가 살고 있는 대륙이다. 실질적으로 가톨릭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에서 1968년 그들의 고단한 삶과 관련해 ‘해방신학’이 나타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세계의 유럽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17,8세기를 통해 더욱 가속화되었다. 유럽의 세계지배가 공고히 되고 유럽 중심의 시각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것이 콜럼버스로 인해 야기된 변화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결과일 것이다.

6. 유럽중심의 사고방식
'발견(discover)'이란 이 세상에 그 전까지는 존재치 않아 아무도 모르고 있던 사실을 새롭게 찾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즉, 덮어져 있어(cover) 세상의 어느 누구도 모르고 있던 사실을 덮개를 치움(dis-cover)으로서 비로소 알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란 무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면, 그 이전에는 아메리카 대륙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인가? 또 그곳이 아무도 살지 않는 비어있는 땅이었다는 말인가? 예컨대 1653년 항해도중 폭풍우로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후일 자기나라로 돌아가서 [표류기]를 쓴 하멜을 조선을 발견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또 조선을 처음 발견한 하멜의 이름을 따서 조선을 ‘하멜’이라고 부른다면? 1794년 서양 고지도에 나타난 조선 지도에 하멜이 표류했던 제주도는 켈파에트(Quelpaerts)라고 명명되어 있고 그 지역은‘네델란드섬들(Dutch Islands)’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신대륙 발견’이라는 말속에는 그곳에 모여 잉카제국, 아스텍제국 등을 이루고 살던 7000~80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깡그리 무시하는 유럽인들의 오만함이 그대로 담겨있다. 1492년 10월 12일은 콜럼버스를 통해 아메리카와 그 원주민들이 유럽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날이자 서로 다른 두 개의 문명이 만난 역사적인 날로 정의되어야 한다.
흔히 우리나라를 극동아시아 또는 동북아시아에 위치한다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어디를 기준으로 했기에 우리나라가 ‘극동’이자 ‘동북’인 걸까? 대답은 자명하다. 유럽에서 볼 때 한국은 동쪽의 끝에 위치하고 있다. 유럽을 기준으로 한 판단인 것이다. 서구인들이 쓰는 지도에는 유럽이 지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지도 오른쪽 끝에 위치해 있다.


예컨대 세계문학전집 하나를 봐도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러시아 등의 유럽작가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이를 유럽문학전집이라고 하지 않는다. 유럽이 곧 세계’인 것이다. 제 3세계 작가들이 일부 끼어있지만 그건 그저 양념일 뿐이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보아왔던 세계지도를 보면 유럽이 다른 지역보다 실제 크기에 비해 훨씬 크게 그려져 있다. 이는 면적보다는 방위를 중시한 메르카토(Mercator)도법에 따라 그린 지도다. 그린란드는 호주의 3분의 1도 안 되는 크기인데도 지도에 따라서는 2,3배는 크게 그려져 있다. 적어도 호주와 비슷한 크기로 인쇄되어 있다. 또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서 유럽국가 전체를 다 합한 면적은 우리가 어떻게 느끼든, 지도에 어떻게 그려져 있든 실제로는 아라비아 반도보다 조금 크고 인도보다는 작다. 그럼에도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보아왔던 지도에는 유럽대륙이 아라비아 반도나 인도는 말할 것도 없고 아프리카 대륙만큼이나 크게 그려져 있다.


왜 그럴까? 일반적으로 자기보다 덩치가 크면 함부로 싸움을 걸지 못하는 법이다. 싸움을 걸어봐야 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우리가 언제 중국과 싸우려고 맘이라도 크게 먹어본 적이 있었던가?
16세기 말부터 방위를 중시한 메르카토(Mercator)도법에 의해 그려진 세계지도는 지난 수세기 동안 별다른 이유 없이 세계 곳곳에서 사용되어왔다. 이미 우리를 포함 모든 사람들에게 익숙한 지도이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실제 면적과 유사한 아니면 지나친 편차를 교정한 지도들이 나타났다. 사실 둥근 지구의 면적을 평면으로 옮겨놓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실제 면적을 보다 중시한 지도가 1977년 피터(Peters)에 의해 그려졌다.  두 지도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명확히 알 수 있다.



경찰서나 파출소 입구에서 보게 되는 독수리 마크만 해도 그렇다. 국가권위를 업은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의 모표위에 독수리가 앉아있다. 곰의 아들(단군)을 시조로 모시고 있고 예로부터 호랑이를 백수의 왕이요 권위의 상징으로 여겨온 우리가 말이다. 왜 이런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독수리는 제우스신의 사자(使者)였으며, 당연히 로마제국 황제의 상징이었다. 이후 로마제국 황제의 권위는 유럽강대국 군주들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오스트리아, 독일, 스페인, 폴란드, 러시아, 미국까지 독수리를 국가권위의 상징 문양으로 쓰고 있다.
이런 예들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이 모두가 서구 중심의 시각이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이미 수백 년을 넘게 사용해와 그런 식으로 굳어져 온 것을 바꿔 혼란을 일으킬 필요가 있는 가는 논외로 하더라도, 역으로 약소국의 시각에서 세계를 들여다본다면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새롭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정복자의 일방적인 시각과 논리가 아닌 피정복자의 시각과 논리를 통해 사실의 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인식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유럽은 ‘신대륙의 희생’을 바탕으로 발전을 위한 자본 축적이 가능했고, 이후 계속적인 수탈로 세계의 여타 지역을 압도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서구 기독교 문명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과정에서 타 지역의 문명을 ‘비문명’으로 치부하고 이를 파괴해왔다. 19세기에 이르러 전 세계의 서구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서구 제국들이 부유해질수록 중남미와 여타 제3세계 국가들은 가난해졌다. 즉 서구 제국의 발전은 여타 국가들의 저발전을 밑거름하여 이루어 진 것이다. 그들은 중남미 국가들을 수탈하는 과정에서 발전, 합리 등의 이름으로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했지만 중남미 국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곧 종속이요 비합리였다.
이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식의 서구중심주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됐다. 1492년 10월 12일은 콜럼버스를 통해 아메리카와 그 원주민들이 유럽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날이자 서로 다른 두 개의 문명이 만난 역사적인 날이다. 그렇지 않는 한 우리는 그야말로 영원히 발견이나 당하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이름 패스워드
목록 글쓰기 새목록
목록 글쓰기 새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