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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회 부경대학교 편 - '재스민 혁명'과 민주주의

2014-09-29 15:40:30   , 1917 조회

written by 4월회

'재스민 혁명'과 민주주의

일 시 : 2011. 12. 6(화) 13:00~15:00
장 소 : 부경대학교
강 연 : 오일환 보훈교육연구원 원장
주 제 :  '재스민 혁명'과 민주주의


Ⅰ. 들어가며

탈냉전 이후 세계질서는 정보화․세계화․개방화․민주화로 압축되고 있다. 오늘날 세계는 정보통신과 교통의 혁명적 발달, 냉전체제의 붕괴와 자유민주주의의 확산, 자유시장경제체제의 보편화, 환경문제의 전지구적 대응, 상호의존적인 세계문제 해결의 필요성 등으로 세계화가 촉진되고 있으며, 정치․외교․경제․사회․문화적으로 세계화 현상은 점차 보편화․다양화․일상화되고 있다. 최근 북아프리카 및 중동 지역 등 아랍권에서 발생하고 있는 ‘시민혁명’은 이러한 시계질서의 변화 양상을 상당부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2011년에 아랍 민주화 시민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튀니지의 알리 대통령과 이집트의 무바라크 대통령, 그리고 저항세력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 등은 모두 오랜 기간 정보통제와 민주화 욕구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무시하고 국민의 살림살이를 도탄에 빠뜨린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보통신의 발달과 해외로부터의 정보 유입은 국민들의 정치의식에 큰 변화를 수반하였고, 이는 결국 시민혁명을 촉진하는 촉매 역할을 하였다. 
그동안 아랍권 일대는 이스라엘, 이란, 레바논 정도가 나름의 민주주의의 규범을 지키는 나라에 속하고, 대부분의 나라들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독재자 1인이 절대 권력을 휘둘러 온 ‘무늬만 민주주의’인 시리아, 이집트, 리비아 등과 같은 독재국가들이거나,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요르단, 바레인,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카타르, 오만, 모로코 등과 같은 입헌군주국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입헌군주국에 속하는 나라들은 왕이 죽어야 권력자가 바뀌는 실정이며, 쿠웨이트와 요르단을 제외하고는 의회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독재 정치 하에서도 비록 때늦은 감이 있지만, 역사 진전의 귀결로 어김없이 민주주의의 봄바람이 불고 있다. 튀니지의 정권교체를 가져온 ‘재스민 혁명’이 이집트, 리비아를 거쳐 아라비아 반도에 속한 바레인과 예멘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그리고 이란 등 북아프리카 및 중동 지역 전역에 ‘아랍의 봄(Arab Spring)’을 가져오며 민주화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요르단, 알제리, 바레인, 팔레스타인, 수단, 사우디아라비아, 모로코, 이라크, 쿠웨이트, 모리타니, 오만, 소말리아, 수단 등지에서도 크고 작은 반정부 시위가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와 같은 돈 많은 일부 산유국에서는 이 춘풍을 막기 위해 ‘당근책’도 쏟아내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400억 달러 이상을 풀어 공무원 임금을 인상하고, 주택보급 등 각종 서민대책을 추진하는가 하면, 쿠웨이트에서는 혁명 초기인 1월 중순에 국민에게 1인당 한화 약 4백만 원을 지급했고, 이와 동시에 13개월 동안 쌀이나 밀과 같은 기본식량을 무료로 배분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
본 강의에서는 먼저 ‘재스민 혁명’의 특징을 살펴본 다음, 시민혁명에 성공한 3국가, 즉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의 시례를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하고자 한다. 또한 우리의 미래와 직결된 북한에서의 시민혁명의 가능성도 타진해 볼 것이다.   

Ⅱ. ‘재스민 혁명’의 특징 

튀니지에서 먼저 발발하여 아랍권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는 ‘재스민 혁명’의 여파는 그 전파 속도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 빠르고, 이 지역에서 역사상 최초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고 놀라운 일로 평가되고 있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 중심에는 젊은 청년층과, 현대 매체 기술의 총아인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와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Social Network Service)로 대변되는 디지털 매체가 있다.
재스민 혁명의 주요 요인들로는 독재자나 전제군주의 폭압정치, 구조적인 인권 침해, 정부의 부정부패 등은 물론, 지속적인 경제 침체, 실직, 극심한 기근, 인구학적 요소 등이 지적되고 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사회 불만세력인 고학력 청년실업자가 많은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원인이다. 시민 교육 수준의 향상과 교육에 따른 개인의 성취 욕구는 계속해서 증가했지만, 정부의 개혁에 대한 무관심과 무능력은 국민들의 불만을 사기에 족하다. 특히 비교적 교육 수준이 높은 젊은 층의 경우는 보편화된 인터넷을 쉽게 이용하여 언제든지 필요한 해외정보를 취득하고 즉각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시대착오적인 독재 권력과 기득권층의 특권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계기만 주어지면 곧 행동으로 나타내기 마련이다.
사실 아랍 국가들에서 여러 반정부 시위가 촉발된 것은 심각한 인권침해를 가져온 독재정치의 지속, 특권층에 집중된 부의 편중 및 부패의 만연 등에 대해 청년층이 강한 반감을 나타내면서부터이다. 특히 독재 정권과 특권층에 대한 선동성 강한 위키리크스의 폭로는 청년층을 자극하여 ‘재스민 혁명’을 유발하는 주요 요인 중의 하나로 작용했다.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역사적으로 청년층에 해당하는 인구 집단이 클 경우 사회가 변혁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오늘날 중동 국가들은 30세 이하 연령층이 전체 인구의 약 60%에 달할 만큼 청년층이 인구 분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튀니지의 경우 25세 이하 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42.2%에 달하고, 이집트의 경우는 52.3%, 그리고 리비아의 경우는 47.4%에 달한다. 이들 국가의 청년층은 높은 실업률로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이어서 부정부패에 찌든 독재정권의 각종 횡포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다. 세계은행(World Bank)에 따르면, 이집트 실업률은 8.4%지만, 25세 미만 실업률은 28%에 달할 정도로 심각하다. 튀니지 또한 전체 실업률은 11%인 반면, 청년 실업은 30%를 육박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재스민 혁명’의 또 다른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이 혁명을 성공시킨 신세대 청년층들이 독재정부에 맞서 전혀 새로운 방식, 즉 SNS를 적극 활용하게 된 점일 것이다. 물론, 반정부 시위의 시작은 대규모 집회를 통한 데모, 시가행진, 파업 참여 운동과 같은 전통적인 방식이 사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조직, 의사소통, 인식 확대를 위해 SNS를 이용한 새로운 방식이 동원되고 있다. 한마디로 아랍권에서 발생한 일련의 시민혁명의 확대는 인터넷, 블로그,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 휴대폰 등의 디지털 매체에 의한 정보 교환이 큰 힘을 발휘했다. 현재 중동 전체의 평균 인터넷 사용 인구는 28.3%로 파악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이집트는 21.2%, 튀니지는 34%에 달한다. 한편, 이집트의 경우는 전체 인구 중 약 76.8%가 핸드폰을 소유하고 있고, 튀니지는 전체 인구 중 약 18%가 페이스북을 사용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주지하다 시피 2009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스마트폰이나 아이폰 등의 급속한 보급은 언제 어디서나 SNS에 접속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는 SNS 사용자의 급증을 수반했다. 이동통신사들은 관련 애플리케이션을 공급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SNS는 웹을 기반으로 하여 사람들이 기존의 인맥 관계를 강화시키거나 새로운 인맥을 만들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SNS를 사용할 경우, ① 실시간 정보 획득, ② 온라인 인맥 구축 서비스를 통한 오프라인 인맥형성, ③ 빠른 시대 적응 등의 유용성을 얻을 수 있다. 보다 세부적으로 SNS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양상을 살펴보면, ① 사람들을 일정한 유형으로 분류하는 서비스, ②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서비스, ③ 사용자들의 신뢰 관계를 기반으로 무언가를 추천하는 시스템을 갖춘 서비스 등을 들 수 있다. 더욱이 SNS를 이용하면 개인의 정보를 공유하고 의사소통을 도와주는 1인 미디어, 1인 커뮤니티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 파급력이 매우 크다. SNS가 광범한 시민들을 동원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인간사회의 양태에 큰 변화의 바람으로 몰고 올 수 있는 SNS의 급속한 보급으로 인해 권위주의 독재체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랍권에서의 민주화의 급속한 진전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마디로 SNS의 발달은 민주화운동의 양상에 큰 변화의 바람을 몰아오고 있다.
한편,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인식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한 점 역시 ‘재스민 혁명’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체계는 아랍권의 중요한 전통으로서 아랍인의 심리구조에 자리 잡고 있는 고질적 요소에 해당한다. 지배 가문의 수장이 ‘아버지’로 여겨지는 가부장적 전통으로 인해 가장 강력한 가문이 해당 부족을 수천 년 동안 지배해 왔다. 국민들은 공화정이든 왕정이든 감히 가부장적 권위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재스민 혁명’은 아랍인들의 마음에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며 이러한 가부장적 전통과 심리구조를 떨쳐버리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Ⅲ. ‘재스민 혁명’의 사례

1. 튀니지의 ‘시민혁명’ 

2010년 12월, 북아프리카 중앙부, 지중해에 연한 공화국 '튀니지'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 의한 시민혁명이 발생했다. 이 시민혁명은 오랜 장기 집권, 부정부패의 부작용으로 시디 부 지드에서부터 시위로 촉발되었다. 첫 가두시위의 발발은 물가폭등과 높은 실업률로 국민들의 불만이 팽배한 상태에서, 12월 18일, 과일 노점상인 무함마드 부아지지(26세)의 분신자살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는 부아지지는 학비를 벌기 위해 노점을 차려놓고 과일 장사를 하였는데, 튀니지 경찰은 불법 행상을 한다는 이유로 그가 팔던 과일을 압수했다. 이에 좌절감을 느낀 부아지지는 고향 시청 앞 도로에서 기름을 끼얹고 분신자살을 감행했다. 이 사건은 소요사태를 불러일으켰다. 소요사태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벤 알리 대통령이 직접 병원을 방문하여, 부아지지를 위문하였지만 이듬해 1월 4일 결국 사망하고 만다. 부아지지의 사촌이 휴대폰으로 촬영한 영상을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이 사건은 국제사회로 곧 확산되었다. 부아지지의 분신자살에 공감한 시민들의 가두시위는 곧 튀니지 국민들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다. 시위는 점차 전 연령층으로 확대되었고, 시위대와 보안군의 충돌로 사망자가 발생하는 사태로 발전되었다. 초기에 높은 실업률에 항의하는 시위는 부패와 인권 침해가 지적된 벤 알리 정권의 23년간의 장기 체제 자체에 대한 저항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1월 7일에는 중부의 도시 타라로에서 시위대가 경찰서를 비롯하여 정부기관 청사와 은행에 방화를 하였고, 1월 8일 밤부터 9일까지 카세린 같은 도시에서도 시위가 발생했다. 당시 보안군의 발포로 14명이 사망했다. 1월 10일에도 카세린에서 방화사건과 경찰서 습격사건이 일어났는데, 경찰의 발포로 4명이 사망하였다. 이처럼 전국적으로 시위가 격화되어가던 중 11일 밤에는 수도 튀니스에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다.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내무부는 사망자수를 23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50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1월 14일, 노조 총파업이 있었으며, 벤 알리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정부해산을 발표하였다. 이에 맞선 대규모 시위는 오랜 기간 철권통치를 유지했던 벤 알리 대통령을 축출하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벤 알리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도피했다. 
결국 튀니지 시민혁명은 23년 동안 장기집권해온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을 축출하였으며, 그 성공을 기념하여 국화(國花)인 ‘재스민’의 이름을 따 ‘재스민 혁명’이라고 불리고 있다.
부아지지의 희생으로 시작된 대규모 반독재 시위 형태의 튀니지 시민혁명은 ‘재스민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이집트, 리비아에 이어 다른 북아프리카 나라들은 물론, 중동 지역의 예멘, 알제리, 시리아, 바레인, 요르단,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등의 나라들로 번졌다. ‘재스민 혁명’은 이집트로 번져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30년 독재정권이 무너뜨렸다. 리비아에서도 반독재 혁명이 일어나 41년 동안 정권을 유지해온 카다피의 독재체제도 종말을 고했다.

2. 이집트의 시민혁명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당한 1981년 이래로 권력을 이은 호스니 무바라크는 비상사태법으로 필요 이상으로 엄격하게 지배하며 이집트 역사상 최장 기간인 30년간 대통령에 재임하고 있었다. 이것도 모자라 무바라크 정부는 테러리즘을 이유로 비상사태법을 확장해 나갔다. 인권 단체는 2010년에 기소나 재판 없이 장기 수감된 사람들이 5천 명에서 1만 명에 달한다고 집계했고 1990년대에 수감된 사람들은 2만 명이 넘는다고 집계했다. 무슬림 형제단 등 반정부 단체들은 이러한 무바라크 정부의 정치적 파행에 크게 반발했다. 이러한 가운데 2010년 6월 6일 알렉산드리아 시디 가베(Sidi Gaber)의 분쟁 상황에서 사에드(Khaled Mohamed Saeed)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운동가들은 「우리는 모두 Khaled Said입니다」 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어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국제 원자력기구(IAEA) 전 사무총장 모하메드 엘바라데이는 사에드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알렉산드리아에서 경찰의 병폐에 대항하는 집회를 열었다.
2010년 12월에는 의원선거가 있었는데, 언론 검열, 체포,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후보자 등록 제한 등을 통해 집권당인 국가민주주의당(NDP)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가운데, 튀니지의 성공적인 혁명, ‘재스민 혁명’은 오랜 독재 권력에 억눌려 온 이집트 시민들을 광장으로 내모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시민들은 2011년 1월 25일, ‘분노의 날’, ‘반란의 날’로 정하고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수에즈와 이스마일파 등의 도시에서 일제히 시위를 일으켰다. 그들은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과 함께 정치․경제 개혁을 요구하였다. 시위 확산을 저지하기 위하여 이집트 정부는 1월 28일 현지시간으로 오전 1시 직전에 대규모 정권 퇴진 시위가 예상되자 이집트 정부는 인터넷 서비스를 중단시켜버렸다. 이는 SNS미디어를 통한 결집력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행위는 오히려 시위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시민들은 금요일 기도가 끝나자 이날을 ‘분노의 금요일’, ‘격노의 날’로 정하고 대거 거리로 나섰다. 수만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순식간에 수백만 명으로 늘었다. 잠재적인 대통령 후보인 모하메드 엘바라데이는 카이로로 돌아와 시위에 합류할 의사를 밝혔다.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인해 최소 1명이 사망했다. 무바라크 정부는 오후 6시부터 오전 7시까지 통행 금지령을 내렸지만 시위자들은 이를 무시했다. 저녁에는 시위대가 카이로 국민민주당 본건물에 방화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다음날 29일 나비 필라이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은 폭력에 의해 300명이 사망했고, 3천 명 부상했다고 발표했다. 혁명적 사태를 직감한 무바라크 대통령은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렇지만, 다음 대선이 있는 9월까지는 대통령직을 지킬 것이며, 정치개혁을 이루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시위자들은 무바라크의 대통령직 하야를 계속 요구했다. 결국 무바라크 대통령은 정부를 해산시키고 새 내각을 지명했다. 이를 계기로 30년 만에 부통령이 임명됐으며, 2월 2일 친무바라크 활동가들이 반시위 집회를 개최함으로써 폭력적인 상황으로 변질되었다. 많은 다국적 기자들 또한 피해를 겪었으며 지역 기자들 중에는 사망자도 발생했다. 2월 10일 무바라크는 모든 대통령의 권리를 부통령 우마르 술레이만에게 양도했으나 집권기까지 대통령직은 수행할 것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시위는 다음 날에도 계속되었으며, 술레이만은 무바라크가 퇴진하면서 권력이 이집트군 최고위원회로 이양됐음을 선언했다.
시위가 시민들의 합세로 점차 대규모화하고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발전하면서 결국 무바라크는, 11일 저녁, 결국 2월 12일, 권좌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술레이만 부통령은 이날 국영TV를 통해 공식적으로 “무바라크 대통령이 이집트 공화국 대통령직을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으며, 이후의 국가 운영은 군 최고위원회에서 위임되었다.

이집트 시민혁명 일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월 17~18일: 튀니지 시민혁명 영향으로 이틀 새 3명 분신
‣1월 25일: 무바라크 대통령 퇴진 및 정치․경제 개혁 요구 대규모 시위 시작
‣1월 28일: 금요기도회 직후 전국적 시위로 경찰과 충돌하였으며, 엘바라데이 가택연금
‣1월 29일: 무바라크 대통령 TV 연설, 내각 해산과 정치개혁 천명
‣2월 1일: 이집트군 “시위대에 무력사용 않겠다”고 선언
‣2월 2일: 무바라크, 차기 대선 불출마 표명
‣2월 3일: 무바라크, '즉각 권력이양' 요구 거부
‣2월 4일: 미국 상원, 이집트 과도정부 촉구 결의안 채택
‣2월 7일: 정부-야권, 개헌위원회 설치 등에 합의했으나 시위 주도 단체는 정부와 협상 거부
‣2월 9일: 개헌위원회 설치
‣2월 10일 = 무바라크 대 국민 연설 통해 9월까지 권력 이양 조기사퇴 거부
‣2월 11일 = 이집트군은 “슐레이만 부통령에게 권력 이양 지지” 발표하였고, 슐레이만도 “무바라크 사퇴 결심, 군에 권력 이양” 발표

이집트 시민혁명은 30년 동안 이어져온 군부 독재정권, 즉 집정관 통치 형태인 프레토리안 레짐(praetorian regime)은 종식시켰다. 군부는 즉시 이집트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 효력을 중지시키는 한편, 30년 간 지속되던 긴급조치법을 해제하기로 했다. 이집트 군부는 늦어도 8월까지 민간에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밝혔지만, 아직 현실화되고 있지 않다.
 
3. 리비아의 시민혁명

카다피 국가원수가 42년 동안 철권통치를 해온 리비아에서는 인권 변호사 페티 타르벨의 연행으로 2011년 2월 15일 반정부 시위가 촉발되었다. 2월 18일부터는 반정권 시위대가 리비아 2대 도시인 벵가지를 점령하였다. 카다피 정부는 벵가지 수복을 위해 외국인 용병까지 포함된 정예 군부대를 파견하여 강경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6천 명 이상이 사망하는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다. 2월 20일에는 시위대 행진이 수도 트리폴리로 이어졌다. 사망자가 수천 명에 이를 정도로 그 수가 증가하자 국제사회의 비난이 쇄도하면서 여러 재외공관에 근무하던 외교관들이 사임하고 정권 퇴진을 요구하였다. 2월 26일에는 트리폴리를 탈환하려는 시위대와 반정부 인사들의 노력에 힘입어 리비아 과도정부가 벵가지에서 출범했다.
리비아 사태가 점차 내전 상황으로 치닫게 되자, 유엔은 3월 17일 결의안 1973호를 채택하였다. 유엔이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는 한편,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필요한 수단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이틀 뒤 프랑스, 영국, 미국 정부는 정부 군 주요 시설에 폭격을 시작했다. 유럽 27개국과 중동 국가들도 곧 결의 이행에 참여했다. 벵가지를 공격하던 정부 국방력도 교외로 철수했으며 리비아 반군이 지중해 연안의 여러 도시를 연달아 다시 차지하게 됐다. 그러나 역공이 거세지면서 정부군이 다시 상당 지역을 재탈환했다. 브레가-아즈다비야 전투까지 이 상황이 계속됐으며 브레가의 경우 정부군이 차지한 반면 아즈다비야는 반군이 차지하였다. 이후 대치 상황은 서쪽 지역으로 옮겨갔으며 3대 도시인 미스라타가 5월 15일 나토 연합국의 공습에 힘입어 반군에 의해 함락됐다. 와진 전투 동안 리비아 정부군은 반군을 포위할 계책으로 수차례 튀니지 국경을 침범했으며 4월 29일 튀니지 군이 이에 반격하면서 국경 인근에서 군력이 철수했다. 이후 카다피가 그의 고향인 시르테에서 시민군에 의해 생포되어 피살될 때까지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4월30일: 나토 공습으로 카다피 막내아들 사이프 알-아랍과 손자 3명 사망
‣5월1일: 카다피 지지자, 駐 리비아 영국 대사관 공격. 영국 정부는 런던 주재 리비아 대사 추방
‣5월11일: 시민군, 서부의 전략 요충지 미스라타 공항 장악
‣5월16일: ICC 검찰, 카다피에 체포영장 청구
‣5월22일: 유럽연합(EU), 리비아 동부 벵가지에 연락사무소 개설
‣5월31일: 이탈리아, 벵가지에 영사관 개설
‣6월9일: 미국, 유럽 주요국 등 30여 개국 대표가 참여한 리비아 연락그룹이 아랍에미리트(UAE) 수도 아부다비에서 회의를 열어 '포스트 카다피' 논의
‣6월 27일: ICC 카다피 체포영장 발부
‣7월 15일: 미국과 유럽 주요국 등이 참여한 리비아 '연락그룹'이 시민군 NTC를 리비아의 합법적인 정부 체계로 인정
‣7월 18일: 시민군, 석유수출항 브레가 북동부 장악
‣7월 28일: 시민군 최고사령관인 압둘 파타 유네스, 내부 반대파에 피살
‣8월 9일: 캐나다와 덴마크, 자국 주재 리비아 외교관들 추방
‣8월 15일: 시민군, 수도 트리폴리 인접한 서부 전략 요충지 자위야 진입
‣8월 20일: 시민군, 자위야와 즐리탄 장악
‣8월 21일: 시민군, 트리폴리 대부분 지역 장악
‣8월 23일: 카다피 진영의 핵심 거점인 바브 알-아지지야 요새 함락. 시민군 트리폴리 전투 승리 선언
‣9월 21일: 시민군, 카다피군 거점 도시 사브하 장악
‣10월 17일: 시민군, 카다피군 거점 도시 바니 왈리드 장악
‣10월 20일: 시민군, 시르테에서 카다피 생포 주장

10월 20일 과도정부위원회에 속한 시민군은 카디피의 추종자들이 흩어져 사는 지역을 집중 공격하는데, 이 과정에서 카다피의 고향 시르테를 완전히 평정 진압했다. 카다피는 시민군에 의해 생포됐으나, 곧 총격 피살되었다. 그의 4남 무타심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카다피의 2남 세이프 알-이슬람은 과도정부위원회의 구금상태에 있으며, 부상을 당한 상태라고 보도되었다. 
리비아의 반군세력은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을 받는 등 국제사회로부터 지지를 확보했지만, 42년 간의 카다피 장기 독재 체제가 무너지면서 발생한 권력 공백이 너무 크고, 민주주의 시스템에 너무 오랜 동안 멀어져 있었다. 튀니지와 이집트처럼 집권세력의 기반이었던 군부가 권력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또한 왕정 권위주의 국가들에서는 종파 갈등이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이며, 정치적 불안도 가중될 가능성이 크다.

Ⅳ. 북한의 ‘재스민 혁명’ 가능성 타진 

60년 넘게 세습 독재정권에 의해 고통을 겪고 살아온 북한 사람들도 과연 1989년 반공산주의 혁명이나 2011년 ‘재스민 혁명’과 같은 반독재 혁명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아랍권에서 불고 있는 ‘재스민 혁명’은 아직도 권위주의체제 하에 억압받는 각국 국민들의 정치의식에 큰 영향을 미침으로써 지구적 차원의 민주화 열풍을 몰고 올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재스민 혁명’의 여파는 북한 땅에도 언젠가는 불어 닥칠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당장은 북한체제가 유일사상에 입각한 수령절대주의체제라는 점에서 웬만한 외부적 충격에도 쉽게 동요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 지배 엘리트는 후계체제 구축과정에서도 수령을 중심으로 정치적 대결이나 갈등보다는 일사불란한 유일지도체제를 유지하면서 내적 통일성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정착되고 제도화된 ‘수령제’의 존재로 인해 대내적 조건에 의한 지배엘리트의 내부동학과 정치적 결단이 강요될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이다. 제도화된 수령제는 정치엘리트의 분화와 개혁파 형성을 막고 정책 대결을 불가능하게 하는 매우 완고한 제약조건으로 작용할 것이다. 수령제는 위기와 불만에도 불구하고 저항세력의 조직화를 막고 정치적 통합을 일정정도 유지해내는 특수한 북한식 조건인 것이다.
 더욱이 북한 당국의 철저한 감시와 탄압에 의한 공포정치는 반정부 운동을 주도할 수 있는 반체제 인물이나 집단의 등장을 근원적으로 어렵게 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체제적 특성은 분명 북한판 ‘재스민 혁명’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이 몰락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북한에서도 어느 정도 정보 유통이 용이해지고 주민들이 각성되고 두려움만 극복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판단된다.
북한에서도 시위나 봉기가 일어나려면, 먼저 북한주민이 의식화되고 조직화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폭압정권에 대항할 시위나 봉기의 구심점, 즉 주도세력이 형성되어야 한다.  물론, 북한 주민들이 독재 정권에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기까지는 아직도 상당한 시간이 요할 것이지만, 일단 외부로부터 각종 정보가 북한 내부로 침투되고 유통되기만 한다면, 어느 순간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집단적인 반체제 저항운동을 전개할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본다. 이러한 상황이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여러 경로와 방법을 통해 한류문화가 북한으로 흘러들어가 일정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북한 내부에 휴대폰 보급이 이미 100만여 대를 돌파하고 있는데, 탈북민들을 통해 한국을 비롯한 외부 세계의 정보가 암암리에 북한 주민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북한당국이 ‘황색바람’을 차단하기 위하여 ‘모기장’을 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북한주민들이 일단 외부 사조를 접하게 된다면, 그들은 북한체제의 본질과 독재 세습정권의 속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지게 될 것이고, 언젠가 어떤 ‘특별한 계기’만 주어진다면, 북한식 재스민 혁명도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가 착실히 통일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편, 북한의 후견 역할을 하고 있는 중국이 민주화 바람, 즉 중국판 ‘재스민혁명’인 ‘모리화 혁명(茉莉花)’에 휩싸이게 된다면, 북한판 ‘재스민 혁명’도 가능할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개방화가 어느 정도 진전되었을 때라야 용이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지금처럼 남북관계와 미․북 관계가 경색돼 있는 상황에서는 북한의 개방이 어려운 실정이다. 북한에게 외부 위협이라는 안보상의 불안감은 체제전환의 결심을 머뭇거리게 하는 외적 조건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남북관계와 미․북 관계의 경색은 북한으로 하여금 체제전환을 어렵게 하는 대외적 조건이 되고 있는 셈이다.

Ⅴ. 나오며

아랍권의 시민혁명을 분석해 볼 때, 정권 유형별로 각기 다양한 형태의 갈등요인이 동시다발적으로 분출되면서 사태가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중동 지역의 정치변동을 단순히 민주화 또는 시민혁명의 틀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들 시민혁명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각국의 향후 정치 및 권력구도는 국가별 혹은 체제별로 다양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재스민 혁명’이 성공한 이집트, 튀니지 등에서는 군부에 의한 신권위주의가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 점에서 이들 국가가 시민혁명에는 성공했으나, 민주화과정은 이제 시작일 뿐이며 지금부터 여러 관문을 거치며 힘든 민주화 여정을 겪을 것이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민주적인 제도를 도입하고 시행할 것이지만, 권력을 이양 받은 군부 세력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부를 구성하려 할 것이다. 물론, 군부세력이 일시적으로는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어느 정도 사태를 안정시킬 수는 있겠지만, 민주화의 진행 과정에서 커다란 정치적․사회적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아랍권에서 불고 있는 ‘재스민 혁명’ 과정에서는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고, 아직도 시리아의 경우에서 보듯이 숱한 인명이 시위과정에서 정부군에 의해 많은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
이에 비해 51년 전 한국의 4.19혁명은 모범적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4.19혁명은 5.16 군사 쿠데타에 의해 민주주의의 이행에 실패했지만, 그 정신은 여전히 살아남아 산업화의 성공 이후 끈질기게 민주화를 달성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런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기에 한국은 남북한 간 체제 경쟁에서 당당히 승리할 수 있었고, 세계를 주도하는 G20 그룹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한국은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해 힘쓸 때이다. 정치엘리트와 시민사회의 정치문화의 성숙으로 정치과정이 더욱 투명해지고, 순탄하게 이행되기만 한다면, 한국은 눈부신 경제발전과 함께 정치적으로도 선진국의 문턱을 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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