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회 한림대학교 편 - 4∙19의 성격과 정치사적 의미
2014-09-29 15:58:16 , 1164 조회
written by 4월회
4∙19의 성격과 정치사적 의미
일 시 : 2012. 10.10(수) 10:00~12:00
장 소 : 한림대학교
강 연 : 김영명 한림대학교 교수
주 제 : 4∙19의 성격과 정치사적 의미
4∙19는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심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수립과 함께 도입된 자유민주주의가 타락하자 시민과 학생의 힘으로 이를 되돌린 중대한 사건이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 헌법 정신을 부정하여 장기집권을 꾀하고 부패하였다. 이런 상황에 분노한 시민들이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들고 일어나 권위주의 부패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 정권을 회복시켰다. 이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민중의 힘으로 부패한 정권을 무너뜨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민주 정신은 그 뒤 군사 정권의 억압 아래에서도 민주 회복을 향한 국민들의 투쟁에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그 뿐 아니라 뒤이은 민주화 시대에도 한국 민주화 투쟁의 상징으로서 민주 발전의 비옥한 토양이 되고 있다.
이 글은 4∙19의 성격과 역사적 의미를 짚어보는 데 목적이 있다. 그 상세한 과정을 서술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쟁점들을 검토해보고, 한국 현대사에서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I. 4∙19의 쟁점들
4∙19는 간단히 말하여, 말년에 다다른 이승만의 장기집권이 국민의 불만과 야당의 반대에 부딪히자 정권이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저질렀고, 이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전국적 시위가 급기야 이승만 퇴진으로까지 비화된 정치적 사건을 가리킨다. 이에 관련된 검토사항은 많은데, 특히 다음의 것들이 관심을 끈다.
1) 왜 학생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는가?
2) 학생들은 어떠한 목적으로 시위에 나섰으며, 그 목표는 어떻게 변해 갔는가?
3) 국가는 학생들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그 대응 방식은 사태의 진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5) 왜 군은 진압에 나서지 않고 정치적 중립을 지켰는가?
6) 왜 미국은 이승만을 포기하고 학생들을 지지하였나?
7) 이 정권 붕괴 후 왜 민주당이 집권하게 되었나? 그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
8) 이승만 정권 붕괴 전과 붕괴 후 일어난 학생 운동 성격의 변화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
9) 5∙16 군사 쿠데타는 4∙19 학생 운동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나?
여기서는 이 쟁점들을 다 다룰 수 없고, 중요한 것만 추려서 검토해보고자 한다.
(1) 학생이 주도한 까닭
학생들이 4월 봉기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당시 한국 사회의 구조적 특성 때문이었다. 당시의 한국 사회는 급속한 도시화로 사회계층의 이동이 있었으나 산업화에 바탕을 둔 계급의 분화와 성장은 미진한 상태에 있었다. 당시의 민간사회는 여전히 기본적으로 농업 사회로서 계급의 조직화와 정치의식의 성장은 걸음마 단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치적 투쟁의 장은 정치사회에 국한되어 있었고, 민간 세력들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국가의 철저한 통제 하에서 이승만의 개인적 지배에 이용당하는 형편에 있었다.
이러한 형편은 수적으로 팽창하고 서구의 선진적인 아이디어들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대학 사회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의 대학 사회는 사상의 획일화와 정치적 독재, 경제적 빈곤, 그리고 대학 사회 자체의 모순과 비리 속에서 정치적 모순에 대해 적극 대항하지 못하는 침체 상태에 빠져 있었다. 대학은 정부의 횡포와 부패에 항거하기는커녕 오히려 관제 시위와 궐기 대회 등에 동원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 대학의 동요는 싹트고 있었다. 대학생의 양적 팽창은 그들의 정치세력화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 앞 장에서 본 바와 같이 1960년경 거의 10만 명에 육박한 대학생의 숫자는 여타 사회세력이 성장, 조직화하지 못한 상황에서 대학생의 정치적 비중을 높일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였다. 수적 팽창에 수반되지 못한 대학의 질적인 침체는 대학생의 사회적 불만을 고조시켰다. 당시의 대학은 교육 시설, 교육의 내용, 학원에 대한 정부의 간섭, 교육 행정의 비민주성, 사학의 비리 등 내부적 모순에 싸여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 조건 하에서 대학생들의 학내 불만은 정치적인 불만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전반적인 구조적 조건은 대학생들의 구체적인 행동 동기와 결합하여 그들이 봉기의 주역이 되도록 만들었다. 당시 대학생의 행동 동기는 적극적인 것과 소극적인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적극적인 행동 동기는 근본적으로 당시 대학 사회가 군부와 더불어(적어도 정치의식의 측면에서) 한국 사회에서 가장 발전한 부문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나왔다. 대학은 자유, 평등, 인권, 민주주의 등 서구의 진보적인 아이디어들을 가장 선진적으로 받아들인 부문이었다. 1950년대 대학 사회가 구조적인 모순 속에서 무기력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대학의 일각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주의적인 사상의 싹이 트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학생들은 기성세대의 무능과 부패에 불만을 갖고 사회정치 지도자들을 불신하였으며, 자신을 민주주의 수호의 전위대로 자처하였다. 이러한 정의감은 한국의 학자-지식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져온 유교적 전통의 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들은 누적된 부패와 부정, 정치적 독재에 대한 불만 뿐 아니라, 당시의 열악한 경제 환경 속에서 장래의 지위에 대한 심한 불안을 느꼈다. 구체적으로 대학 졸업자들의 대량 실업 사태는 전반적인 사회적 불안과 더불어 학생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종합해 볼 때, 학생들의 불만에는 사회정치적 차원에서의 부정부패 및 독재에 대한 불만과, 생활고, 실업의 전망, 대학 내의 실정에 대한 불만 등 보다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불만이 뒤섞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중 어떤 요인이 정치적 봉기로 행동화하는 데 더 중요했는가를 밝히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는 더 본격적인 분석을 요구한다. 잠정적으로 여기서는 자신과 보다 밀착된 조건에 대한 불만이 정치적 행동화의 보다 간접적인 잠재적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며, 사회정치적 상황에 대한 도덕적 분개가 보다 직접적인 봉기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상정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도덕적 분개가 자유당에 의한 부정선거의 자행이라는 촉매를 통해 정치적 봉기로 폭발한 것이었다.
(2) 국가의 대응
초기의 학생 항거에 대한 국가의 대응은 정책적 경직성과 무기력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였다. 이러한 경직성과 무기력은 제한된 목표로 시작된 학생 시위를 일반 시민이 대거 가세한 정권 퇴진 운동으로 비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학생들의 시위를 공산주의자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선언하고, 경찰력을 동원하여 폭력적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경찰의 폭력 진압은 학생들의 분노를 고조시켰고 일반시민들의 가세를 초래했다.
4월 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시위가 대구와 마산 등 지방으로부터 서울로 확산되었다. 4월 18일 일어난 반공청년당원들에 의한 고대생 습격 사건은 사태의 확대에 불을 붙인 또 하나의 촉매가 되었다. 이제 경찰력은 시위 군중을 진압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4월 19일 일어난 대규모 시위는 이제 부정선거 규탄에 머무르지 않고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었다. 소규모의 제한된 목표로 시작된 운동이 대규모의 전국적 정권 퇴진 운동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3) 군부의 역할
4월 봉기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송요찬은 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킨 것이 봉기가 성공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후일 주장했다. 계엄령 선포에 따라 주요 도시에 주둔한 군인들이 시위대에 발포했더라면 아무도 막을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당시 실제로 계엄군이 시위대에 발포하고 진압에 나섰을 경우 민주화 운동은 실패하고, 민간사회는 국가의 탄압 아래 상당 기간 동안 침체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광주의 유혈 진압을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권위주의 지배세력의 진압과 독재의 강화가 장기간 지속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이 정권이 존속되었다고 하더라도 심각한 정통성의 문제 때문에 오래 가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보다 장기적인 유혈사태의 지속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당시 군부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고 정부의 발포 요청을 거부하였다는 현실이다. 왜 그랬던가? 이에 대해 한승주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었다. 첫째, 미국이 군의 고문관을 통해 군 동원을 반대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확인되지 않았다. 둘째, 한국군은 소수의 군 지도자가 자신의 정치적 신조를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단일체가 아니었다. 셋째, 마찬가지로 군 지도자들 중에는 반공을 제외하고는 목숨까지 걸 체계적 가치관이나 이념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고위 장교들은 대체로 이승만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으나, 그 충성심이 위기 상황에서 목숨을 걸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 이승만과 고위 장교들의 관계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기회주의적인 후원-피후원의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결정적인 정치적 위기시에 군 지도자들은 정권과 정치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더구나 나중에 살펴볼 것과 같이 당시의 군부는 내부 분열의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쿠데타 계획도 이미 나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군의 개입을 저지하였다. 군부의 불개입은 국가가 사회세력의 도전 앞에서 동원할 수 있는 최후의, 그리고 결정적인 힘의 자원을 잃게 되었다는 점을 의미했다.
(4) 미국의 역할
1950년대 전 기간에 걸쳐 미국이 한국의 정치 과정에 미친 영향이 지대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이 정권의 붕괴에도 미국 정부는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부는 부정선거의 파문이 일자 이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으며, 상황이 대규모 대중 봉기로 발전하자 학생과 시민의 민주적 투쟁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4월 26일 매카나기 당시 주한 미국 대사는 이승만을 방문하여 그의 하야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 왜 미국 정부는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봉기세력을 지지하였는가? 그리고 미국의 태도 표명과 정치적 개입이 봉기의 진전에 얼마만한 영향을 미쳤던가? 앞 장에서 본 바와 같이, 미국 정부는 효율적인 반공 지도자로서의 이승만의 정치적 가치를 인정하였으나, 그의 경제적 비효율성과 정치적 독선을 몹시 혐오하였다. 미국은 군사․경제 원조를 통하여 한국에 반공의 보루이자 자유민주주의의 진열장을 만들고자 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실상은 그들에게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제거하고 싶었으나, 그를 대체할 효율적인 반공적 지도자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한국 국민의 전면적인 저항이 일자, 미국 정부는 이 기회에 부패하고 독선적인 이 승만 정부를 보다 민주적이고 친미적이면서 동시에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정부로 대체하기를 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미국 정부가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민주 저항 세력을 지지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취한 대 한국 정책의 일관된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정책이 봉기의 성공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당시 나타난 상황을 볼 때, 민주 봉기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정권 붕괴라는 결과는 기본적으로 한국 내의 정치세력간의 투쟁의 결과로 파악된다. 봉기는 국내 사회세력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촉발되었고, 국가의 효율적 대응의 실패가 이를 격화시켰다. 미국 정부는 이승만에게 압력을 가하거나 지지를 철회하는 방법으로 이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개입이 저항세력에게 고무적인 힘으로 작용했고, 집권세력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었음은 짐작할 수 있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의 하야 결정만 하더라도, 세간의 일부 추측과는 달리, 매카나기가 그를 방문하였던 4월 26일 아침 이전에 이미 내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미국이 한국의 정치과정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4월 봉기의 발생과 진행과정은 외부의 힘보다는 일차적으로 국내 정치세력들 간의 힘겨룸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Ⅱ. 4∙19의 명칭, 한계, 의미
4∙19는 ‘혁명’ ‘의거’ 또는 아무 명칭 없이 그냥 ‘4∙19’ 등 여러 가지로 불리고 있다. 5∙16 쿠데타 세력은 그 의미를 축소하고 자신의 거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를 ‘의거’ 곧 ‘의로운 거사’로 의미를 축소하여 일상화시켰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여 4∙19의 의미를 중시하는 쪽에서는 이를 ‘혁명’으로 부르기를 즐긴다. 김영삼 정부도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을 펼치면서 이를 ‘혁명’으로 규정한 바 있다. 어느 쪽도 다 문제가 있다.
의거는 학술적 용어가 아니니 논외로 치자. 필자는 1992년의 저작에서 왜 혁명으로 규정하기 어려운지를 길게 설명하였다. 그 근본 원인은 혁명의 뜻에 있는데, 혁명이란 ‘어느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4∙19는 한국의 국가나 민간사회의 근본적인 구조 변혁을 이루지 못했고, 이를 시도하지도 않았다. 시도할 이념이나 지도력도 없었다. 정권이나 정치사회의 수준에서 보면 권위주의 일인 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 정권을 수립하였기 때문에 혁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도 법이나 제도의 면에서는 민주 정권이었고 민주적 정치 절차가 있었기 때문에 민주당 정권의 법․제도와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단지 차이는 실제 적용의 차이였다. 정권이 자유당에서 민주당으로 넘어갔지만, 정권이나 정치사회의 주역들의 근본 성격이 변하지 않았으므로, 이 수준에서 혁명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4∙19를 혁명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민중이 집권세력에 대해 ‘들고 일어났다’는 의미에서 봉기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 단지 요즘에는 이 말이 학문적으로나 일상 용법으로나 흔히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 흠으로 남는다. 또 글쓴이는 4∙19에 대하여 학문적이 아니라 상징적이거나 실천적인 의미에서 4∙19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주는 것에 대해 굳이 반대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4.19는 한국 민주화 운동에서 큰 획을 그었고, 혁명의 경험이 없는 한국인의 결핍감을 해소해 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4∙19는 해방 이후 한국에 도입된 한국 민주주의가 이승만의 개인적 통치로 시들어 가던 현실에서 이를 되살릴 기회를 제공했고, 더 나아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힘으로 집권자를 교체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또 이러한 성공이 이후 독재 권력 앞에서 민주화 투쟁이 끊임없이 지속되게 한 중요한 정신적 원동력이었고 역사적 교훈이자 정치적 토대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4∙19 운동의 정치사적 의미는 지대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운동은 동시에 중요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우선 기성세력이 아니라 학생이 주도했다는 데서 근본적인 한계를 지녔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당시 학생 이외에는 어떠한 민간 세력도 이승만 정권을 타도할 힘을 가지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만큼 당시 한국의 정치-사회적 성숙도가 낮았다는 말이다. 학생들이 이 정권이 무너진 뒤 이를 수습할 위치에 있지 못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사실이었다. 이를 대체할 정치세력은 크게 미흡하여 이 정권 붕괴 후의 권력 공백을 메우거나 거세어진 학생-시민 세력들의 요구들을 수용할 능력이 없었다. 더 근본적으로 이승만이 사라진 후 이를 대체할 민간 정치세력이 크게 미흡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들은 이승만 후의 정치 과정을 주도하고 민주개혁을 이루며 동시에 드높아진 사회-정치적 요구들을 수용할 수 있는 체계적인 프로그램이나 이념을 갖지 못하였다.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 역시 정권 타도 이후의 새로운 정치 질서에 대해 아무런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시위는 즉흥적이었고 돌발적이었고 비체계적, 비조직적이었다. 학생세력의 목표는 처음에는 ‘학원 자유’ ‘부패와 독재의 배격’이었다가, 3∙15 부정 선거와 마산 사태를 계기로 ‘부정 선거 배격’ ‘정권 퇴진’ 등 더 정치적인 구호로 나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일종의 혁명적 분위기가 창출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학생이든 주변계층이든 중산층이든 이 정권 사퇴라는 기대보다 엄청난 정치적 사태 앞에서 그 다음의 질서를 구상할 능력도 준비도 없었다. 이러한 힘의 공백에서 당시 최대 야당이던 민주당이 정권을 인수한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이승만의 하야로 조성된 일종의 혁명적 분위기과 이로 인한 대중 욕구의 분출을 수습하거나 주도할 의도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다. 그 결과 5∙16 군사쿠데타로 무너지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볼 때, 4∙19 주도세력은 이승만 하야 전이나 후나, 체제 전복과 신체제 건설을 위한 사회혁명, 혹은 정치혁명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를 뒷받침할 이념적 토대도 없었고, 조직적 기반도 없었으며, 정치적 지도세력도 없었다. 심지어 그들이 보수적이고 무능하다고 불만을 품은 민주당 정권에 대한 퇴진의 요구도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4∙19는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봉기였다고 할 수도 있으나, 오히려 독재와 부패에 반대한 봉기였다고 하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깝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4∙19의 역사적 의미가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상황은 혁명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적어도 부패한 정권을 쓰러뜨릴 수 있는 시민의 힘을 발휘한 것은 한국의 역사상 길이 기억되어야 할 사건이었다. 그것은 한민족의 역사상 국민 대중이 통치 권력을 쓰러뜨린 최초의 사건으로서 심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4∙19는 대한민국 수립과 동시에 이승만 정권이 도입했으나 실천하지 않은 자유민주주의적 이상에로의 복귀를 시도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독재와 반독재의 싸움이 이 사건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4∙19는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후 한국 민주화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으며, 그 정신은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4∙19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커다란 이정표가 되었음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