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회 호남대학교 편 - 삶의 질과 인간의 권리
2014-09-29 16:03:34 , 1072 조회
written by 4월회
삶의 질과 인간의 권리
일 시 : 2012. 10. 17(목) 09:30~11:30
장 소 : 호남대학교
강 연 :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
주 제 : 삶의 질과 인간의 권리
1. 삶의 질(quality of life):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부유한 삶, 권세 있는 삶, 지위나 명성을 누리는 삶, 학식을 가지는 삶, 존경 받는 삶, 등등, 여러 가지 가치 가운데 어떤 가치를 좋은 삶의 기준을 볼 것이냐는 문제는 윤리학이나 철학 및 종교에서 오랫동안 논의해 온 주제지만, 명확한 답이 나오지도 않은 문제입니다. 앞으로 언젠가는 이 문제에 대해 하나의 정답이 나올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런 정답이 하나 있으리라고 보기 보다는 개인들의 기질이나 취향 및 가치관에 따라 의견이 갈라지는 주제라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최근에는 의학이 발달하고 영양 공급이 충분해지면서, 오래 살기가 좋은 삶을 마치 대변하는 듯 한 풍조가 일각에 있습니다. 오래 살기를 과거에는 한자어로 장수(長壽)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도 병든 몸으로 오래 살기를 좋은 삶으로 치부하지는 않았고, 보통 무병(無病) 장수라는 조건이 하나 더 붙었습니다. 즉, 건강하게 오래 살기라는 뜻입니다. 몸이 건강하게 오래 살아도 걱정이나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면 별로 바람직하지 않겠지요. 그래서 행복하고 건강하게 오래 살기라는 식으로 조건이 하나 더 필요하기 쉽습니다. 요컨대 단순히 오래 살기만 하면 좋은 것이 아니라 잘 살면서 오래 살아야 한다는 얘기기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좋은 삶의 문제는 결국 다시 잘 살기의 문제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좋은 삶이라고 하나 잘 살기라고 하나 결국 단어의 외피만 살짝 다를 뿐 뜻은 똑 같은 말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good life이고, 고대 그리스어로 말하면 eudaimonia가 됩니다. 단어로는 이렇게 비슷한 말들을 모을 수 있지만, 실제 내용이 무엇인지는 방금 대략 살펴봤듯이 규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엇이 “좋은 삶” 또는 “잘 살기” 또는 “eudaimonia”를 구성하는지는 기본적으로 개인 각자의 판단에 따라 달라진다고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질에 관한 판단 기준은 이처럼 궁극적으로는 각 개인의 선택에 맡겨져 있는 사안입니다. 그렇지만 각 개인의 선택에 궁극적으로 달려있는 사안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적 차원에서 논의를 해볼 수는 있습니다. 이와 같은 논제를 두고 사회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논의는 두 가지 갈래로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범죄를 규정하는 경우처럼 사회 구성원 가운데 주류에 해당하는 다수가 보기에 개인들 및 사회 전체에 해를 끼친다고 간주되는 행위의 범위를 정해서 반칙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행위가 타인 및 사회 전체에 해를 끼치는지 아닌지, 그 해의 종류가 처벌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인지 아닌지 등을 명쾌하게 분간할 수 있는 기준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각 개인의 선택에 대해 사회적 차원에서 논의가 벌어지는 다른 갈래는 어떤 행위를 범죄로 규정해야 할 것인지 여부를 포함해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행동에 관해 바람직한지, 해도 괜찮은 것인지, 하면 안 되는 것인지 등을 다양한 각도에서 논의하는 영역입니다.
삶의 질에 관한 논의는 이와 같은 두 갈래의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저질러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고 사회 구성원 다수가 합의한 사항에 대해서는 법규와 처벌의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하는 반면에, 그러한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 영역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논의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각종 논의의 와중에 동물적인 생존 이상의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인간적인 삶, 또는 인간 특유의 삶에 관한 관심이 발굴됩니다. 그리하여 헌신, 희생, 사랑, 협동, 평화, 질서, 정의, 등등의 가치가 인간 특유의 속성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동물에 속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여타 야생동물들과 다름없이 약육강식이라고 하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삶의 질이라는 관념은 단순한 생존이나 약육강식과 같은 자연계의 물리적 법칙 이외의 어떤 영역에 위치하는 가치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가 야생동물들로 이루어진 밀림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고 하면, 인간 역시 각자 운수와 재주에 따라 살다 죽는 것으로 그만일 뿐, 삶의 질이라는 관념이 적용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어질 것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인간이나 동물이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인간 사회라고 해봤자 결국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을 뿐이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생존 이상의 가치 따위는 없다고 믿으면서 정의나 진실을 포기하고 금전적 이득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생존 이상의 가치는 없다고 강변하기가 쉽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공자나 소크라테스의 시대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적 삶이 생존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고 믿으며 실천하는 사람들도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존재합니다.
전자의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은 정의나 평화 그 자체를 추구하기 보다는, 정의나 평화를 표방하는 사회질서에 적응해서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서 삶의 질을 찾습니다. 반면에 후자의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약육강식보다는 무언가 나은 형태의 사회생활을 동경하는 와중에 정치적 권위의 정당성이 어디서 나오는지, 정당한 정치적 권위를 수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같은 질문을 파고들어갑니다.
인권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질문을 묻다 보면 만날 수밖에 없는 핵심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2. 인간의 권리
1) 개념
인권, 또는 인간의 권리는 영어식으로 human rights를 번역한 문구입니다. 이 문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를 가리키는데,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 봐야 할 사항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여기서는 두 가지만 살펴보기로 합니다.
첫째, 인권에 관한 논의는 인권을 주어진 사회 또는 문명 내부에서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평등한 권리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사회, 문화, 문명의 차이나 경계를 넘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인권에 관한 논의는 기본적으로 법치의 원리, 다른 말로 하면, 법 앞에 평등이라는 원리와 밀접하게 관계됩니다. 인권이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basic rights)라는 데에는 이미 평등한 권리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권력이 법의 지배 아래 놓여야 합니다. 그리고 법이 권력을 지배할 수 있으려면, 조직된 인민의 실력이 법을 뒷받침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경로를 통해, 주어진 사회 내부에서 평등한 기본권으로서 인권을 이해하는 관심은 곧 해당 사회의 정치질서에서 인민이 지지하는 기본 원칙, 즉 법이 중추적인 기준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편성하는 관심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후자의 경우, 즉 인권을 사회나 문화의 경계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 문화상대주의와 관련되는 까다로운 질문과 마주치게 됩니다. 예컨대, 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성이 지켜야 하는 전통적인 율법과 서유럽 사회에서 공인되는 여성의 인권 개념이 충돌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에, 서유럽에서 이해하는 인권이 이슬람 문화권에까지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근거에서 서유럽의 개념이 “보편성”을 내세울 수 있느냐는 1반론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 한국에서도 학생인권조례는 체벌이나 소지품 검사를 학생에 대한 인권 침해로 규정하는 반면에,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소위 “교육적 목적”을 위한 체벌이나 소지품 검사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논란에서 인권을 옹호하는 편의 주장이 어떻게 보편적일 수 있느냐는 질문은 직선적으로 대답하기가 불가능한 종류에 속합니다.
둘째, 앞에서 삶의 질과 관련된 논의는 두 갈래의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법규를 정해 위반자를 처벌하는 방향의 논의와 그처럼 엄정한 규칙을 추구하기까지는 않는 상태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뤄지는 논의의 방향입니다. 인권에 관한 논의 역시 이 둘 중 어떤 갈래로든 진행할 수 있습니다. 인권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행위가 인권에 대한 침해가 되는지를 법률로 규정하고, 나아가 인권 침해에 대한 처벌 조항까지 법률에 정한 다음에 국가의 공권력으로 이를 강행하려는 방향의 논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여러 가지 형태의 의견이나 제언을 공론장의 의제로 삼아 일단 논의해 보는 데서 그치는 방향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도 논의가 진행하여 사회 내부에서 일반적인 합의에 도달하게 된다면 법규와 처벌의 기준을 정하는 데까지 연장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수준의 합의까지 도달하지 않고 단순히 공론 장에서 논의만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상호 이해를 증진하고, 나아가 인권의 의미에 관해 보다 심층적이고 보다 다각적인 인식이 확산되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2) 인권의 범주에 들어가는 항목
인권의 범주에 들어가는 권리의 항목들은 통상 두 부류로 분류됩니다. 첫째는 정치적/시민적 권리이고, 둘째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입니다.
정치적/시민적 권리라 함은 참정권, 신체의 자유, 표현(발언)의 자유, 이동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는 생존권, 생활권, 우아한 삶의 권리 (의료, 교육, 안전), 소수라는 이유로 차별(박해) 받지 않을 권리, 문화적 취향을 발현할 권리, 발전권(잠재력을 계발할 수 있는 권리), 등이 포함됩니다.
정치적/시민적 권리는 압제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국가 또는 사적인 집단이나 타인들로부터 부당하게 억압이나 강제를 당하지 않을 권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억압이나 강제는 외부 세력의 작위에 의해서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처한 환경이나 사정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가 경제적 사정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면, 그래서 잠재력을 발현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빈곤의 대물림 또는 신체적 질환에 시달리게 된다면,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지만 외부적 강제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신체적인 위해를 당하는 상황과 결과에서 비슷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산업화의 덕택으로 전체 사회는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릴 때, 빈곤 때문에 자기 발전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이들이 환경으로부터 억압당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시각이 가능하게 됩니다.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라는 발상은 이와 같은 시각으로부터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3) 주요 인권 선언문
미국 독립선언문 (Declaration of Independence of the U.S.A., 1776):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로부터 불가양의 권리를 부여 받았는데, 생명권, 자유권, 행복추구권이 거기에 포함된다고 선언함으로써, 인권의 개념을 명시적으로 표명한 최초의 공식 문서.
미국 헌법 (Constitution of the U.S.A., 1789): 인민주권과 사회계약이라는 이념에 따라, 정의, 평화, 복지, 자유가 공동체의 목표임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문서.
프랑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La 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1789): 모든 개인의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가 자연권이며 보편적임을 천명한 문서. 양심과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법 앞의 평등 등을 선언한 문서로서, 프랑스 대혁명 이후 소집된 제헌의회에서 채택되었다.
미국 권리장전(American Bill of Rights, 수정 헌법 1-10조, 1791): 미국 헌법 제정 이후 국가의 권력에 대항할 수 있도록 개인의 권리를 강화한 내용을 헌법에 추가한 문서. 표현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 등이 명시적으로 선포되었다.
유엔 세계인권선언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1948): 인권의 개념을 전 세계로 연장해서 적용한 최초의 공식 문서. 영문 약어로 UDHR이라 불리며, 1966년에 채택한 국제규약 두 건(ICCPR, ICESCR)과 더불어 국제인권장전(International Bill of Human Rights)이라 일컬어진다. 이 선언이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12월 20일은 국제 인권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인종청소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 (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 1951, CPPCG): 1951년에 41개국의 조인으로 발효되었고, 그 후 현재까지 142개국이 받아들였다.
유럽 사회헌장 (European Social Charter, 1961): 1953년에 발효된 유럽 인권규약(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 ECHR)의 내용을 크게 확장한 유럽국가들 사이의 협약으로 1996년에 개정되었다. 주거, 건강, 교육, 노동, 고용, 육아휴직, 빈곤과 사회적 배제로부터 사회적․법률적 보호, 자유로운 이동과 비차별, 이주노동자와 장애인의 권리를 기본적 인권에 포함시켰다.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 (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 1966, ICCPR):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에 비해 인권의 내용을 더욱 명확하게 규정하고 확장하기 위해 1966년에 유엔에서 결의한 국제 인권규약. UDHR, ICESCR과 함께 국제인권장전이라 불린다.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 (International Covenant on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 1966, ICESCR):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에 비해 생존권과 생활권을 명시하고 확장한 국제 협약. 건강, 교육, 노동, 적절한 생활수준 등을 기본적 인권으로 규정했다. 현재 160개국이 가입했고, 미국을 포함한 7개국은 행정부가 조인했지만 의회가 비준하지는 않은 상태이다.
모든 형태의 인종 차별 철폐에 관한 협약 (Convention on the Elimination of All Forms of Racial Discrimination, 1969, ICERD): 모든 형태의 인종 차별을 철폐하고 서로 다른 인종들 사이의 상호이해를 증진하기 위한 협약으로서 1965년에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고 1969년부터 발효되었다. 현재 86개국이 조인했고 175개국이 가입했다.
아메리카 인권규약 (American Convention on Human Rights, 1969, ACHR): 아메리카 대륙의 나라들이 맺은 인권 협약으로서 1969년에 채택되고 1978년부터 발효되었다. 미주기구 35개 회원국 가운데 현재 24개국이 조인하고 비준했는데, 미국은 조인만 하고 비준은 하지 않은 상태이다. 캐나다의 경우는 이 규약이 라틴아메리카의 가톨릭 성향을 반영하여 임신부의 낙태권을 부인하기 때문에 조인하지 않고 있다.
아파르트헤이드 범죄의 억제와 처벌에 관한 협약 (Convention on the Suppress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Apartheid, 1973, ICSPCA): 인종적 차이를 겨냥한 범죄를 반인륜범죄로 규정한 국제 협약으로 1973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현재 31개국이 조인했고, 151개국이 가입했다. 하지만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은 가입하지 않고 있다. 이 협약의 뒤를 이어 2002년에는 국제형사재판소가 설립되었다.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협약 (Convention on the Elimination of all Forms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 1979, CEDAW): 1979년에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고, 1981년부터 발효되었다. 현재 187개국이 가입했지만, 부분적인 유보나 반대를 표명한 나라들이 많다.
모든 형태의 불관인과 종교 또는 믿음에 근거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선언 (Declaration on the Elimination of All Forms of Intolerance and of Discrimination Based on Religion or Belief, 1981): 관인의 풍토를 진작하기 위해 1981년에 유엔 총회에서 결의되었다. 이를 이어 유네스코는 1995년에 관인의 원칙 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 on Tolerance)을 선포했다.
고문을 비롯하여 잔혹하고 비인간적이며 존엄을 파괴하는 취급 또는 형벌에 반대하는 협약 (Convention against Torture and Other Cruel, Inhuman or Degrading Treatment or Punishment, 1984): 1984년에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었고, 1987년부터 발효되었다. 78개국이 조인하고 151개국이 가입한 상태이다. 고문의 위험이 상당한 곳으로는 사람을 추방하거나 인도하거나 송환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다.
만민의 평화권 선언 (Declaration on the Right of Peoples to Peace, 1984): 1984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선언으로서, 모든 사람이 평화의 권리를 가진다고 선포했다. 전쟁을 겪지 않는 것, 즉 평화가 인간의 모든 다른 권리가 실현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형태의 전쟁, 특히 핵전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고, 모든 정부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선언했다.
아프리카 인권 헌장 (African Charter on Human and People's Rights, 1981): 아프리카 통일기구(OAU, 아프리카 연맹의 전신) 회원국들이 1981년에 채택한 인권 협약으로, 1986년 10월 21일에 발효되었다. 10월 21일은 아프리카 인권의 날로 기념된다. 뒤를 이어 1987년에는 아프리카 인권위원회가 설립되었고, 2004년 이후로는 아프리카 사법재판소(African Court of Justice)의 발족으로 이어졌다.
발전권 선언 (Declaration on the Right to Development, 1986): 발전권이라는 개념은 1981년 아프리카 인권 헌장에서 최초로 정형화되었다. 이를 받아 유엔 총회는 1986년에 발전을 경제/사회/문화/정치가 결합한 종합적 과정으로 보면서, 모든 개인이 발전 과정에 참여하고 거기서 나오는 혜택을 공정하게 분배 받음으로써 전체 인구의 복지가 지속적으로 향상되도록 하는 데 목표가 있다고 천명했다.
아동권리협약 (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 1989, CROC): 아동의 시민적/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 및 건강권을 보장하는 국제 협약으로서, 1989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어, 현재 140개국이 조인했고, 193개국이 가입한 상태이다. 유엔 회원국 가운데는 미국, 남수단, 소말리아만이 가입하지 않고 있다.
4) 실제 상황
방금 열거한 것 이외에도 수많은 인권 규약과 협약이 국제적으로 조인되고 비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 규약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들도 아직 많습니다. 더구나 이런 국제 규약에 가입한 나라들이라도, 이 규약들을 문자 그대로 준수하고 있지는 못한 실정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상은 비일비재입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인권침해, 특히 그 사람이 범죄 혐의를 쓰고 있을 때 인권침해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가 아동, 여성, 소수 종족 또는 문화적 소수자들에게 배제되는 경우가 많은 점은 두 말할 나위가 없고, 시민적/정치적/사법적 권리조차 사실상 부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시민적/정치적/사법적 권리 가운데서도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 할 수 있는 참정권만 해도 형식적인 보장의 이면에서 실질적으로는 강력한 제약 요건이 작용합니다. 미국의 경우, 선거일이 공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저소득층은 투표를 위해 일당이나 시간급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배심재판이라는 제도로 말미암아, 소수 종족인 흑인은 유죄판결을 받을 확률이 높아지고, 유죄판결을 받게 되면 참정권이 제약되며, 다시 전과가 있는 사람은 배심원 선정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높아져서, 흑인이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을 확률이 높아지는 악순환도 있습니다.
이 밖에도 여성, 소수 종족, 문화적 소수자, 장애인, 등에 대한 물리적/심리적 차별이 벌어질 때, 그들이 경제적/사회적으로도 약자이다 보니, 사법 당국으로부터도 공정한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는 악순환 역시 상존합니다.
3. 삶의 질과 인권
1) 내 권리와 남의 권리
내가 남의 권리를 존중해 준다고 해서 남이 내 권리를 존중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교통법규를 내가 잘 지킨다고 해서, 내가 마주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이 교통법규를 잘 지키게 되지는 않습니다. 인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인권을 존중한다고 해서 남들이 나의 인권을 존중하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인권은 보편성을 지향하는 이념입니다. 주어진 사회 안에서, 또는 지구촌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사회 안에서, 구성원 모두가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누려야 할 권리가 인권입니다.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는 구성원 일부가 인권을 누리는 반면에 나머지는 누리지 못하는 사회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인권을 누리는 사회입니다. 인권이 이처럼 보편성을 지향하는 이념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선의가 모이면 그러한 보편성이 담보될 것처럼, 그리하여 모두가 남의 인권을 존중한다면 각자 모두의 인권도 존중받게 된다고, 따라서 모든 사람의 삶의 질이 향상된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맨 처음에 지적했듯이 좋은 삶이 무엇인지는 개인에 따라 견해가 크게 달라지는 문제입니다. 어떤 사회에서든, 모든 사람이 서로 타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상태를 좋은 삶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남들이 나의 인권을 존중하는 만큼 내가 남의 인권은 존중하지 않는 상태를 좋은 삶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소위 무임승차군(free rider)의 문제가 여기서도 발생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남들이 나의 인권을 존중해 줄수록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착취해서 나는 남의 인권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존중하지 않고 버틸 여지가 더 넓어질 수 있습니다.
사회 전체 차원에서 볼 때, 대다수 사람들이 서로 남의 권리를 존중하면서 사는 사회와 대다수 사람들이 서로 남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 사이에서 어느 편이 더 좋은 사회인지를 공개적으로 묻는다면, 아마도 대개 전자가 더 좋은 사회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공개적인 담론에서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실제 자신이 행동하는 모든 국면에서 남의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선택을 내리게 되지는 않습니다. 사실은 남의 권리를 인정할 생각이 별로 없는 사람일수록 공개적인 담론에서는 남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할 이유가 오히려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권이 삶의 질의 향상으로 직결되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인권과 삶의 질 사이의 관계는 인과관계 같은 객관적인 관계라기보다는 개인의 내면에서 이뤄지는 윤리적 결단 또는 선택의 차원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관계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남의 인권을 존중함으로써 향상될 수 있는 삶의 질은 인권을 서로 존중하는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더 낫다고 하는 나의 도덕적 판단에 입각해서 내가 실제로 행동한다는 내면적인 의미와 긴밀하게 연관됩니다. 타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나의 행동은, 이 내면성 안에서, 모두가 남의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를 구성하는 한 개인의 행동에 해당하게 됩니다. 아울러 내가 나 자신의 도덕적 결단을 실제 행동으로, 그리고 남들이 보든 말든, 실천하고 있을 때, 나의 삶은 하나의 일관된 삶이라는 의미를 획득하게 됩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인권을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다가 남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는 경우에 따라 타인의 권리를 부인하기도 하는 형태의 삶에 비해, 공개적인 말과 실제 행동이 일치하는 삶이 질적으로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일관적인 언행일치의 삶이 말과 행동이 일관되지 못한 삶에 비해 질적으로 더 낫다는 말 역시 하나의 도덕적인 선택일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권과 삶의 질의 관계는 각 개인의 도덕적인 결단에 따라 긴밀한 연관이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사항입니다.
2) 관인 - 다른 사람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
마지막으로 최근에 한국에서 자주 언급되는 관인(寬忍)에 관해 한 마디를 보태고자 합니다. 이는 영어에서 tolerance 또는 toleration이라는 단어, 프랑스어로는 톨레랑스(tolérance)로 표현되는 이념인데, 한국에서는 흔히 관용(寬容)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자면, 관용보다 관인이라고 옮기는 편이 본래의 뜻에 더욱 부합합니다.
관용이라고 하면 너그럽게 받아들인다는 뜻인 반면에 관인이라고 하면 너그럽게 참아 준다는 뜻인데, 톨레랑스의 이념은 전자를 포함할 수 있지만 거기에 국한하지 않고 후자까지 포섭하기 때문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 듣기 싫은 주장, 내게 역겹거나 내 눈에 해로워 보이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받아들이지는 않고 단순히 참아내는 것에 비해 조금 더 부담스러운 일이 됩니다. 더구나 내게 역겨운 내용이라도 발언할 수 있는 권리가 타인에게 있다고 내가 인정하기 위해 내가 그의 발언을 받아들이기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그의 발언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단순히 참아주기만 하더라도 그의 발언권은 충분히 인정됩니다. 이처럼 타인의 발언권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의 발언을 참아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듣기 싫다면 피해서 안 들으면 되는 것이고, 쫓아가서 입을 닥치라고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내가 그의 권리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관인이란 타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일 뿐, 그가 펼치는 주장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내가 남을 관인한다고 해서 남이 나를 관인하게 되는 인과관계는 없다. 단, 대다수 사람들이 서로 관인하는 사회와 대다수 사람들이 서로 관인하지 못하고 으르렁 거리는 사회를 각 개인이 맘속에서 그려 본 다음에 하나를 선택하고, 그러한 선택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실천하는 내면적인 결단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차이를 참아내는 사회는 사회적 평화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개인적 사생활이 보호될 수 있는 사회입니다. 반면에 이런 사회는 획일적인 도덕의 원칙에 따라 규율되는 사회라기보다는 다양한 도덕의 원리가 공존하면서 폭력적으로 충돌하지는 않는 사회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도덕의 다양성을 곧 도덕의 타락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인권의 이념은 다양한 도덕이 공존하는 다원주의와 상통합니다. 다원적으로 구성된 사회를 지향하는 삶이 더 좋은 삶인지 여부는 각 개인의 도덕적인 판단에 맡겨질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