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진주보건대학 편 - 민주주의와 국가발전
2014-02-17 16:29:58 , 1113 조회
written by 4월회
민주주의와 국가발전
일 시 : 2011. 10. 28(금) 오후5시
장 소 : 진주보건대학
강 연 : 윤영오 국민대학교 명예교수
주 제 : 민주주의와 국가발전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권위주의 체제가 민주체제보다 더 효율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세계사적으로 볼 때 권위주의 체제가 일시적으로 국가발전을 시킬 수는 있으나 지속적인 발전을 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많은 예에서 알수 있다. 2차대전의 주축국인 독일, 이태리, 일본은 일시적으로 그 세력이 커졌으나 전쟁에서 패퇴하는 가운데 엄청난 퇴보를 하였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모두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중국의 경우에도 시장경제체제를 받아들인 후에 발전 할 수 있었다. 한국의 경우에 민주화와 산업화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바 1960년 4·19혁명과 관련한 나의 개인적 경험을 얘기하면서 설명하려고 한다.
1960년 자유당 정권이 집권 연장의 수단으로 자행한 3·15 부정 선거는 전국적인 국민의 분노를 초래하였다. 당시 경기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나도 정부 여당의 독재와 부정에 대해 분노를 느꼈으나 어떻게 항의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가운데 좌절감을 느낄 뿐이었다. 대구, 대전, 마산, 부산 등 전국적으로 그러나 산발적으로 일어난 항의 시위가 무위로 끝날 것 같던 4월 초 다시 항거의 촉진제 역할을 한 것은 한쪽 눈에 탄환이 박힌 채 수장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마산에서 발견 된 일이었다. 당시 중학교를 갓 졸업한 김군의 비극은 전국적으로 특히 고등학생과 대학생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고 그 이후 많은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촉진하였다.
‘피의 화요일’로 불린 4월 19일, 평소처럼 학교에서 수업을 하였는데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부터 총성 소리가 들렸고, 수업에 전념할 상황이 아니었으나 수업을 박차고 시위로 이어지지도 못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3학년 선배 몇 명이 교실에 들어와 시위의 필요를 역설하였으나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당시 학교 가까운 안국동에 살던 나는 귀가한 후 한동안 개인적으로라도 시위대에 합류해야 할 것 같은 충동을 느꼈다. 평소 정의감이 강한 어머님의 갈등은 나보다 더 컸으리라 생각된다. 어머님은 장래 민주 이념을 계승해 나가는 역할을 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논리로 나를 위로해 주셨다.
나는 작년 4월 19일 KBS 특별좌담에 출연하여 당시 시위에 참여 못하여 부끄러웠다는 심정을 토로하면서, 그러나 그 때의 경험이 이후 내 인생에 있어서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고 회상한바 있다.
세상의 모든 운동이나 혁명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혁명의 주체와 참여자는 제한적이기 마련이며, 그 이념에 동참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지속적으로 계승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그 운동은 빛나는 것이다. 불행히도 4·19 혁명 이듬해에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으며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대학에 진학한 나는 민주와 정의에 대한 탐구를 심도있게 하기 시작했고 관심의 대상과 영역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이나 징기스칸에 대한 관심보다는 민주 정치를 주창한 에이브러햄 링컨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의 끝 부분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지상에서 소멸하지 않도록 하는 위대한 과업에 우리의 몸을 바쳐야 할 것’ 이라고 말한 링컨의 말을 여러 번 되새겼다.
당시 나는 취미로 고전 음악을 듣기 시작했는데 베토벤이 단연 으뜸이라고 생각하였다. 교향곡 제 5번 ‘운명’처럼 심오하고 웅대한 차원에서 뿐 아니라 그가 보여 준 정의에 대한 신념을 알게 되어서 더 존경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베토벤 자신이 제 5번 ‘운명’ 이상으로 높이 평가하였다는 제 3번 ‘영웅(Eroica)'은 처음에는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고 허였으나 나폴레옹이 압제로부터 해방시킨 역할에서 벗어나 새로운 독재자로 군림하는 과정에서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베토벤이 실망하고 분개하여 헌정사를 지웠다는 일화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은 괴테의 동명 비극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에그몬트는 조국의 독립에 몸을 바친 16세기 네덜란드의 장군으로 결국 붙잡혀 사형을 선고 받으며 그의 애인 클레르헨은 그를 구하려다 실패하여 자살한다. 그러나 그녀의 환영은 자유의 여신이 되어 옥중의 에그몬트를 격려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는 이 곡은 에그몬트 백작의 기백을 상징하듯 장대하며 빛나는 승리감으로 넘치는 코다는 특히 감동적이다.
4·19혁명 때 고등학생으로 시위에 참여하지 못한 내가 대학생으로 처음 시위에 참여한 것은 세칭 ‘6·3사태’로 호칭되는 학생운동이었다. 한일 회담의 진행과정을 비밀에 부쳐온 박정희 정부는 1964년 3월 들어 정부가 한일 회담의 3월타결, 4월조인, 5월비준의 방침임을 밝혔다. 후에 밝혀진 것처럼 정치자금 마련 등 국가적 이익보다는 정권의 이익에 사로 잡혀 ‘대일본 청구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졸속으로 진행시킨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5월부터 학생 시위가 확대되었으며 6월 3일에는 전국적으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위기의식을 느낀 박정권은 6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였고 각급 학교의 무기 휴교, 언론의 사전 검열을 단행하였다.
나는 민주체재를 구현하려는 연세대 내의 학술단체인 ‘한국 문제 연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지명 수배되어 있던 시위 주동 학생 현승일(4월회 회원)을 우리 집에 피신시키게 되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원기(후에 국회 의장 역임)는 내 큰형의 친구인데 당시 큰형은 미국 유학 중이었고 김원기 형은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왔고, 윤보선 당시 야당 총재 집에 피신한 현승일(당시 서울대 4학년)을 그 옆집인 우리 집으로 이동시켜야 하는 사정을 설명했다. 나는 어머니의 적극적인 협조와 아버지의 묵시적인 허락을 받아 현승일(나보다 1년 선배)과 내 방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다. 몇 주 후에 현 선배는 사업하시는 내 아버지에게 피해를 입혀서는 안 되겠다고 하여 우리 집에서 자수하는 기자 회견을 한 후 종로 경찰서로 스스로 구금되었고, 나도 범인을 은닉하였다는 명목으로 고초를 당했다.
내가 민주와 정의에 눈을 뜬 것은 4·19 혁명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후 나는 미국 유학 시절 우리 4월회 회원인 김경재 전 의원이 발행한 독립신문에 필명으로 민주화를 위한 칼럼을 썼으며, 워싱턴으로 망명 온 김대중 선생님이 미국 도착 직후에 미국 기자와 회견한 곳도 당시 버지니아에 있던 나의 아파트였다. 이 후 김대중 선생님을 돕는 역할도 하였다. 귀국하여 국민대 교수로 재직 중 민주화 운동 참여로 학교로부터 시말서를 강요받기도 했으며, 전두환 정권 시절 민주화를 위한 개헌을 지지하는 시국 선언문 발표의 국민대 주동 교수로 경고를 받기도 했다. 민주화 과정에서 여러 신문과 TV를 통해 ‘용기 있는 발언’을 하는 교수로 평가받았다고 생각한다.
민주화 이후에는 시민 각자가 법과 질서를 지키는 역할을 강조하였는데, 민주체재에서는 군대와 경찰등 공권력에 의한 강제적 질서가 아닌 시민 스스로의 법질서 준수가 더욱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대통령 시절 정당정치의 민주화와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설립된 여의도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2년간 일한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성장기 시민의 한 사람으로 나를 민주와 정의에 눈뜨게 해 준 역사적 사건이 4·19 혁명이었다.
이후 한국은 다른 독재국가와 달리 권위주의체제 하에서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이룩하였을 뿐 아니라 4·19민주혁명의 계승인 민주화 운동을 통하여 민주화도 이룩한 가운데 국가 발전을 도모하게 되었으며 선진국 대열에 합류 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