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추계예술대학 편 - 꿈을 만드는 사람
2014-02-17 14:45:28 , 1610 조회
written by 4월회
일 시 : 2010. 11. 10(수) 오후 3시
장 소 : 추계예술대학교
강 연 : 김주하 앵커
주 제 : 꿈을 만드는 사람
나는 위인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위인전을 읽다 보면 그 위인들의 어려운 과정들 힘든 일들 그들이 어떻게 거쳐 왔고 이겨왔는가를 그린 내용들도 많지만 대부분이 ‘원래 그들이 잘나서’라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어려운 과정들을 읽다보면 결국은 그들의 천재성에 가려져서 그런 것들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너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발상의 전환을 한 책이다. 우리는 보통 “잘난 사람들이 어떻게 잘났을까? 그들이 원래 잘나서 그랬겠지” 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말콤 글래드웰은 이 책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원래 잘나서 그렇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좋은 상황을 만난 것이고 자신은 좋은 시절을 만났고 운이 좋았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것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빌게이츠 또한 시대를 잘 타고 나서 쉽게 말해서 운이 좋았기 때문에 그가 지금의 성공을 이뤄낸 것이라는 것이다. 그가 가졌던 그 운은 그가 고등학생 시절 당시 컴퓨터를 거의 구경도 할 수 없었던 시절에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는 거의 세계에서 유일한 컴퓨터가 있었다. 그리고 빌게이츠는 이곳을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어떤 특권을 누릴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빌게이츠 집 근처에는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는 워싱턴 대학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주변의 상황이 좋았다. 학교에 그런 컴퓨터실이 있었고 물론 지금 비교할 수 없는 크기의 컴퓨터였겠지만 프로그래밍을 수 없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위치가 또 그랬고 그는 운이 좋았던 것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예로 비틀즈도 또한 운이 좋았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비틀즈는 독일에서 우리에게 알려지기 훨씬 이전에 7년 동안 자기들이 몇 시간 동안 마음껏 우리말로 찍고 까불고 할 시간을 얻었다. 7년 동안 이들은 수 없이 노래하고 연주할 기회가 있었다. 말콤 글레드웰은 그런 기회를 아마 다른 누군가 다른 그룹이 혹은 개인이 가졌다 하더라도 그들 또한 비틀즈 같은 천재 혹은 세상에서 아주 알려진 유명한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백만장자들 모두 시절을 잘 타고 태어난 것이다. 그 시절에 하필이면(또는 운이 좋게도) 전쟁이 일어났고 그래서 수요가 필요했고 그들은 부자가 될 수 있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본인이 원래 잘나서 잘된 사람은 없다 이렇게 얘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난 여기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대단한 사람들이 얻은 그 기회, 그 기회는 단지 우연히 생겨난 것인가? 그렇다면, 나에게 그 기회가 오지 않는다면 난 그냥 살다 죽어야겠군? 난 이 책을 보면서 그런 의문점을 가졌다.
물론 그런 기회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1955년에 태어나서 1975년에 처음으로 개인 컴퓨터가 나오고 그 좋은 시절에 딱 20살 우리나라 나이로 21살이었던 빌게이츠 굉장히 운이 좋았다. 물론 그러기도 했지만, 그렇다면 그 고등학교에서 빌게이츠하고 똑같이 1955년에 태어나고 그 당시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사람은 빌게이츠 하나였을까? 아니다. 그 학년의 모든 아이들이 같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말콤 글레드웰은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모차르트 또한 운이 좋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물론 나중에 그의 노력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나의 집에도 피아노가 있다. 나의 피아노가 옆에 10년 이상 있었지만 나는 피아노 먼지만 닦았지 피아노 연주하지 않았다. 분명 나에게 기회가 있었지만 난 그것을 잡지 않았던 것이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온다. 그러나 그 기회를 잡는 사람은 따로 있다. 그 사람은 준비된 사람이다. 그렇다면 준비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칭기즈 칸에 대해서는 물론 뭐 동양인들도 굉장히 우러러보고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유럽 사람들도 칭기즈 칸에 대해서는 굉장히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칭기즈 칸의 과거가 어떠했는지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의 어록 중에 하나를 살펴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난 아홉 살에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었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었다.
병사로는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00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게 없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를 귀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목에 탈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는 나를 극복하는 순간,
나는 칭기스 칸이 되어있었다.“
칭기즈 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 많은 젊은이들이 것, '난 돈이 없어, 우리집안은 돈이 없어, 난 못생겼어, 난 키가 작아, 난 속칭 백이 없어, 그러니까 나는 안 돼' 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에게는 칭기즈 칸의 이 어록을 읽어보라고 꼭 이야기하고 싶다.
‘난 그런 열약한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변하고 싶어, 난 성공하고 싶어, 난 달라질 거야’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나 또한 그랬었다. 나는 굉장히 가난했다. 아주 어릴 때는 그래도 괜찮았던 집안이 어느 날 쫄딱 망했다. 2층집에서 단칸방으로 이사를 갔다. 나는 갑자기 이것은 내 생활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한순간에 그렇게 됐기 때문에 '아 여기는 내 집이 아니야 자고 일어나면 예전 내 방에서 눈을 뜰 거야' 어린 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상들을 하고 살았다. 그렇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인가부터 그 꿈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갖고 싶은 방, 살고 싶은 집 그리고 물건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어려서 그게 뭔지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설계도면이었던 것이다. 방 어디어디 있고, 마루 어디 있고, 창문 어디 있고 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 당시에는 그게 어떻게 그리는 지도 몰랐다. 내가 너무 갖고 싶고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눈에 보인다. 예전에는 길 가다가 보면 분양한다는 아파트 혹은 뭐 전단지 같은 게 쓰레기였는데,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보다 보니까 그게 쓰레기가 아니라 정보가 되는 것이었다. 내가 집을 만드는데, 그림을 그리는데 어떤 소스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예전에 그냥 버렸던 것들이 지나가다 보면 그걸 주서 오게 된다. 주워오고 거기 나와 있는 표 같은걸 참고해서 그림을 그리는 그렸다. 내가 얼마나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동생하고 싸우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 당시에는 피아노가 없었다. 그런데도 동생하고 나는 피아노가 네 방에 있어야해 내 방에 있어야해 정말 머리 잡고 싸웠었다. 그리고 침대의 위치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하나씩 가구를 들이다 보니까 - 물론 상상이다 - 굉장히 구체적인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내가 그 꿈을 꾸기 시작한지 딱 10년 되던 해에 제가 이사를 갔다. 1993년 이사를 가서 보니까 내가 그리던 그 꿈의 집이 있었다. 어머니랑 나랑 앉아서 한없이 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집이 쫄딱 망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만약에 내가 갑자기 어려워지지 않았다면, 꿈꾸는 법을 몰랐을 것이다. 꿈을 꿀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어려웠기 때문에 꿈을 꾸기 시작했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리고 나의 길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에게 어려움과 시련을 주었던 그 시기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꿈꾼 것은 비단 집만이 아니었다. 내가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다는 것도 꿈 꿨다. 만약에 ‘무엇이 되고 싶다. 앞으로 어떠한 사람이 되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꿈을 꾸라. 아주 구체적으로. 나는 예전에 내가 가졌던 꿈 중에 하나가 중학교 때인데 영화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에 여주인공 전지현씨의 제복 입는 모습을 보고 여군이 되는 꿈을 꾸었다. - 어릴 적에는 몰랐지만, 이후 성장한 후 알게 되었다. 제복이 입은 핏이 아무에게나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밤마다 상상을 하면서 잤다.
내가 한참 꿈을 꾸다가 잠이 들었다. 예를 들면 내가 연병장에서 어머니와 헤어지면서 어머니가 발을 잡고 우셨다. 가지 말라고. 그런 것부터 시작해서 그리고 상사에게 얻어맞는 것도 생각을 했었다. ‘그래도 괜찮아 할 수 있어. 왜 나도 때리면 돼지’ 이런 상상을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꿈을 접게 되었다. 내가 어느 날 밤에 상상하다 보니까 내가 전쟁터에 나간 상상을 한 것이다. 그리고 총에 맞는 상상을 했다. 어찌나 리얼하게 제가 느꼈는지 깨고 나서도 너무너무 아팠다. 그리고 또 다시 잠들기 전에 상상을 한다. 근데 총에 팔을 맞아서 원래 살아야겠지만 꿈에서는 죽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내 무덤에 와서 풀 뜯으면서 막 우시는 상상을 하니까 도저히 그 꿈을 지속시킬 수가 없었다. 나는 군인은 못하겠다.
그 다음에 수의사 꿈을 꿨다. 나는 동물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래서 어머니하고도 싸우기도 했다. 어머니는 수의사 되는 것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나와 싸우셨다. 나는 개, 고양이, 말 이런 것들이 좋아서 그랬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알려주셨다. “네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동물들도 치료를 해야 한다. 뱀도 치료를 해야 하고, 코끼리도 만져야 한다.” 그래서 거기서 수의사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접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앵커, 사실 이것도 고등학교 때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방송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구체적인 꿈을 꿨을까 싶은데 그 당시에 온갖 방송사고에 대해 꿈을 꾸었다. ‘내 귀에 도청장치’부터 시작해서 스스로에게 ‘내가 방송을 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내가 인터뷰를 갔는데 인터뷰를 안 해주면 어떡하나?’ 여러 가지 상상들을 하였다. 이랬을 때, 저랬을 때 그런데 굉장히 놀랍게도 그런 것들이 내 마음속에 내 머리 속에 차곡차곡 쌓이다 보니까 실제로 그런 방송 사고가 났는데도 당황하지를 않게 되었다. 마치 꿈속의 하나인 것이다. 여러 번 경험해 본 일인 것이었다.
얼마 전에 후배하나가 나에게 물었다. "선배는 사람들이 실수를 안 하는 줄 알지만 실수 많이 하는 거 안다. 그런데 티가 안 난다. 당황하지를 않더라. 어떻게 된 거냐?" 왜냐하면 생방송에서 당황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나 역시 당황한다. 그런데 나는 내가 하도 여러 가지 꿈을 꿔서 그때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당황하지 않는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온다. 하지만 준비된 사람만 그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준비된 사람인가? 꿈을 꾸는 사람이다. 계속 꿈을 꾸고, 생각하고, 상상하면 그 길이 나에게 보이게 되어 있다. 준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일만 시간의 법칙이 있다, 무엇이든지 노력한 것이 만 시간을 넘기면 성공한다는 이야기이다. 비틀즈도 7년 동안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매일 연주 했다. 일만 시간을 채웠다. 그리고 우리가 원래 천재라고 알고 있는 모차르트도 사실은 일만 시간을 거쳐서, 십년 간 연습하고 노력한 시간에 거쳐서 비로소 천재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만 시간이면, 하루에 8시간씩 한 5년 정도, 3~4시간씩 하면 한 10년이 되는 시간이다. 그만큼 투자한 사람이 얻을 수가 있다. 그러나 많이 하면 지루해진다. 나도 해보니까 그렇다. 피카소는 2만점을 그렸고, 아인슈타인은 원래 천재라고 하지만 사실 240편의 논문을 쓰면서 그 중에서 인정받은 것은 몇 개 되지 않으며, 바흐는 매주 한 편씩 칸타타를 작곡했고, 에디슨은 1039건의 특허를 신청했다.
내가 늘 이야기 하는 것이 있다. 물론 연습이 중요하다. 최선을 다하는 연습도 중요한데, 나는 저는 백 번의 연습보다 한 번의 실전이 낫다고 본다. 그 실전에 몸을 던져라.
기회는 내가 만들 수 있다. 성공한 사람은 그 기회를 만드는 사람이다. 내가 앵커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주의에 정말로 무엇을 참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금은 인터넷만 봐도 정보가 많지만 20년 전에는 인터넷 문화가 거의 없었다. 지금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앵커가 되며,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대학을 갔을 때, 컴퓨터를 켜기 위해선 도스라는 디스켓을 넣어야 했다. 부팅을 해서 컴퓨터를 켰다. 지금은 버튼 하나만 누르면 컴퓨터가 켜진다. 컴퓨터를 켜기 위해서 켜는 법을 배우러 컴퓨터 학원을 가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니까 당연히 인터넷을 통해서 뭔가를 얻는 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서점가서 아날로그 정보를 찾아보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얻고자 하는 정보는 없었다. 방법이 없어 그냥 KBS에 전화했다. 무턱대고 전화해서 어떻게 해야 앵커가 될 수 있냐고 물어봤다. 물론 그 사람은 고등학생이 전화해서 물어보니까 황당했었을 것이다. 내가 처음부터 인사부에 전화해서 물어봤으면 참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난 그 당시에 인사부가 뭔지도 몰랐다. 그래서 ‘앵커는 아나운서가 되나보다. 아나운서국으로 전화하자’라고 생각하고 대표번호에 전화해서 아나운서국에 전화해서 물어봤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전화를 돌려 돌려 결국 받은 데가 인사부였고 전화를 받으신 분이 굉장히 친절하게 웃으면서 말씀해주셨는데, 그 분의 말씀이 힘이 되어 앵커를 준비 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당시 이과생 이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방송사에 들어가려면 신문방송학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신문방송학과는 문과인데 문과를 해야 하나?’ 여러 가지 고민을 했었는데 그 분이 “그냥 당신이 선택한 전공을 가지고 공부를 해라. 대신 나중에 방송사에서 보는 시험 준비를 따로 해서 붙으면 된다” 고 얘기 해주셨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 가서 신문반을 들까, 방송반을 들까 고민하다가 그분 말씀 때문에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사실 그게 옳은 선택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그 분이 전공 공부를 하지 않고 다른 공부 한답시고 다른 공부를 하거나, 신문반·서클 활동한답시고 공부 안하는 것을 우리 방송사에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때 ‘아, 그래 전공공부하고 시험 준비를 따로 하자’고 다짐했다. 그 분의 한마디가, 전화통화 1분 남짓한 시간이 나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런데 그 1분의 통화시간은 누가 만든 것인가? 그것은 내가 만든 것이었다. 누구든 할 수 있다. 누구든 기회를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대학을 갔다. 그런데 대학을 가서 보니까 뉴스 원고를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뉴스 원고가 없어서 신문으로 연습을 했는데 신문체하고 뉴스 앵커들이 말하는 문체는 완전히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신문으로 아무리 연습해 봤자 그 느낌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카세트데크를 가지고 TV 앞에 서서 어깨에 메고 녹음하는 거였다. 뉴스 앵커들의 리딩을 녹음하는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 반복해 들으면서 뉴스 원고를 만들었다. 받아 적으면 그것이 뉴스 원고가 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받아 적었다. 그리고 그 원고를 보고 읽으면서 내 목소리를 다시 녹음하고 비교했었다.
처음에는 똑같이 목소리를 내는 것을 연습했다. 내가 그 당시 매우 좋아했던 앵커가 이규환 아나운서였는데 그분을 따라하면서 혀가 녹아내릴 만큼 계속 연습을 했다. 그런데 계속 듣다보면 이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 모르게 된다. 그래서 그때 했던 것이 그 당시에 취업설명회나 언론인·방송계에 있는 선배들이 와서 강의를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가서 듣는 것이다. 그리고 질문하는 거였다. 당신은 자신의 꿈의 모델이 되는 누구를 만난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물어보겠는가? 나는 2가지가 있었다. 당시에 나는 내 꿈을 상상하면서 마음이 조급했다. 시험 볼 수 있는 나이도 2년 밖에 남지 않았었다. 지금은 나이제한 이야기하면 인권위원회 제소하지만 그 당시에는 나이제한 당연히 있었다. 이것이 큰 고민이었고 질문거리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내 목소리가 과연 방송사에서 받아 줄만한 목소리인가?’였다. 그 당시에는 내가 입을 열면 사람들이 “에이~”라고 반응했다. 왜냐하면 목소리가 매우 굵기 때문이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 케이블 방송사들이 생기면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래서 여기저기 시험도 보러 갔었는데 방학 동안에 아르바이트 하면서 내가 배울 수 있을까 싶어서 응시했는데 다 떨어졌다. 목소리 때문이었다. 목소리는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공부할 수 있고 내가 노력해서 바꿀 수 있다면 괜찮은데 목소리를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취업 강좌나 특강이 있으면 쫒아갔다. 그 당시 모 선배가 와서 앞에서 강의를 했었다. 그 당시에는 앵커만이 아니라 모든 방송사 취업을 원하는 학생들이 특강을 듣기 위해 왔기 때문에 엄청난 수가 모였다. 강의도중 강사가 “질문 있습니까?”라고 하는데 굉장히 많았다. 약 3분의 2 이상이 손을 들었다. 내가 손을 들어도 강사가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나는 철제필통을 천장에 집어 던졌다. 필통이 천장에 부딪히면서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내용물이 쏟아졌다. 그러니 사람들이 다 놀라서 쳐다봤다. 학생들도 쳐다보고 강사도 쳐다보고. 그 순간 나는 질문을 했다. 가장 궁금했던 것. “내가 되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했다.
그리고 그 분이 강의가 끝나고 나가는데 쫒아 나가 몸싸움을 해서 그 분의 옷자락을 잡고 “내가 연습한 것이 맞는지 알고 싶다. 그리고 나에게 싹이 보이는지 알고 싶다, 아니면 나는 포기 할 것이다. 당신이 조금이라도 가망성이 있다고 한다면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분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본인이 월요일 오후 5시 여기서 녹화가 있는데 그때 와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찾아갔다.
기회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바보이다. 그리고 기회는 계속 만들 수 있으며 기회가 주어졌을 때, 절대로 놓치지 말라.
그렇다면 무조건 최선을 다하고 노력을 한다고 성공을 할까? 아니다. 당신이 원하는 꿈이 당신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나는 그것이 굉장히 되고 싶고 원하지만, 다른 사람이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아닐 수도 있다. 당신은 그것을 위해서 스스로 부딪혀 봐야 한다. 나는 증권맨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있다면 나는 증권사 아무 곳이나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는 “월급 안줘도 좋으니까 거기서 한 달 동안 일하게 해주십시오. 복사만 시켜도 좋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옆에서 복사만 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들이 일하는 것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의사, 선생님 생각하면 앞에서 강의하는 것 누굴 치료하는 것만 생각한다. 방송사도 마찬가지이다. ‘앵커가 되고 싶어요’ 라고 하면 앞에 나와서 한 시간 동안 뉴스 전하는 것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만 보고 온 사람들은 거의 실패한다. 설사 된다 할지라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하고 싶은 일, 원하는 일에 대해서 정말 구체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해봐야 한다. 앵커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인턴 레지던트 거쳐야 하고 이런 것들을 다 거쳐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면 관련된 모든 것들을 당신은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슬프지만 아직까지 세상엔 남녀차별이 존재한다. 여성은 미안하지만 반드시 더 노력을 해야 한다. 물론 우리 때에 비하면 많이 개선되었다. 내가 아침 뉴스 할 때는 택시를 타기가 힘들었다. 아침 뉴스 할 때에는 새벽 세시에 나와서 세시 반 안에는 회사에 도착해야 하는데 택시를 타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택시기사가 첫 손님으로 여자를 태우면 재수 없다고 승차거부 했었을 때이다.
지금은 많이 바뀌기는 하였지만 아직은 멀었다. ‘아, 그냥 난 여자니까, 난 출산도 했는데..., 난 여자로서 한 달에 한번 피곤하니까’ 이러한 이야기들은 남녀 차별이 확실히 없어지고 평등한 시절이 왔을 때 그때 이야기 하라. 저런 이야기는 여자후배들에게 줄 기회를 여자선배들이 빼앗는 것이다.
리더가 되고 싶은가? 세상을 바꾸고 싶은가? 그렇다면 남들과 달라야 한다.
“미쳤다는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부적응자였고, 반항아였고, 문제아였다. 그들은 네모난 콘센트에 둥근 전기코드를 꽂으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규칙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관습을 존중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들의 말을 인용하거나 그들의 생각에 반대할 수도 있으며, 그들을 찬양하거나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해서는 안되는 딱 하나는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을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 미치광이를 보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천재를 본다. 왜냐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미친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세상을 바꿀 수 있기에“
이 글은 요즘 아이폰으로 아이패드로 세상을 뒤흔든 애플의 1997년 광고문구이다. 애플의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는 광고다. 간디, 아인슈타인, 피카소, 에디슨, 무하마드 알리, 마틴루터킹, 존 레논 이런 사람들이 여기에 애플의 광고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남들과 다른 생각을 했고 세상을 변화시켰던 사람들이다. 애플이 이렇게 다르게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있는 그 자리에서 안주하지 말고 세상을 바꾸는 주인공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