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한양대학교 편 - 도전과 열정 그리고 성취
2014-02-17 15:16:04 , 1137 조회
written by 4월회
일 시 : 2010. 12. 2(목) 오후 3시
장 소 : 한양대학교
강 연 : 서거원 대한양궁협회 전무이사
주 제 : 도전과 열정 그리고 성취
지난번 광저우 아시안 게임 보았는가? 정상에 선다는 것, 정상을 오랫동안 유지한다는 게 참 생각보다 쉽진 않다. 한국의 양궁이 이 불모지에서 세계 최고가 될 때까지, 최고를 유지하기 위해 과연 어떠한 생각과 어떠한 행동으로 하고 살아가는가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나는 국가대표 양궁 감독을 20년 하였다. 내가 만일 인기 종목 축구나 야구의 감독을 1년 동안 했다면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 최고라는 종목인 양궁 감독 20년을 했던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것이 비인기 종목인 양궁의 현실인 것 같다. 몇 개월 전 KBS2 TV에 이금희 씨가 진행하는 아침마당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리더십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 한 시간 출현했던 내용을 가지고 많은 사람이 알아봐주었다. 양궁 감독 20년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생각이 들어 참 안타까웠다.
우리 양궁하면 세계 최고, 올림픽 싹쓸이 종목, 효자 종목이라고 이야기한다. 언제부턴가는 우리 양궁 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 중에 3개 따면 본전이라고 한다. ‘아시아 대표로 누구나 다 이룰 수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양궁은 초창기 때 정말 어려웠다. 축구, 농구, 배구 거의 100년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 양궁은 그 절반 역사, 이제 약 45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65년경에 유럽의 양궁 기술이 한국에 도입되었다. 60년대 중반, 후반, 70년대 초반까지 북한보다 못 살았던 아시아의 빈민국가에 선진 양궁기술이 도입됐다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하지만 끊임없는 도전과 좌절을 겪어가면서 내공을 쌓아간 것이다.
우리나라 양궁이 도입된 지 30년 만에 처음으로 국제 대회에 파견되었다. 그때 현재 한국체육대학교에 교수로 있는 김진호 선수가 어린 여고생의 신분으로 1979년 베를린 세계 양궁에서 혼자서 금메달 6개 중에 5관왕 했다. 세계 선수권 5관왕. 그녀가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전 국민이 열광했었고, 정부 차원에서 김포공항에서 광화문까지 카퍼레이드 하는 내용을 KBS가 전국에 생중계 했다.
1984년 LA올림픽에 서향순 선수가 우리나라 최초 여자 금메달 획득하면서 드디어 여자 양궁선수가 세계 정상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 여세를 몰아서 4년 후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남자가 또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그때까지 남자는 미국, 여자는 소련이었다. 감히 넘보지 못할 거대한 미·소를 무너뜨리고 한국의 남자가 정상에 올라서게 된 때가 1980년 중반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 25년 동안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계속 정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한국 양궁 왜 저렇게 잘 할까? 뭔가 잘 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이유가 뭘까?’ 라는 말을 많이 한다. 혹은 인류학자, 사회학자들이 ‘원래 우리 민족이 활을 잘 쏘는 민족이다.’ 라고 말한다. 세상에 활 잘 쏘는 민족이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우리 양궁의 역사는 유럽의 역사이다. 양궁의 종주국은 영국이다.
인류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게 활이다. 이 활이 점차 발전해져서 보다 강력한 활을 가진 부족국가가 나타나고 활이 전쟁의 도구까지 발전한다. 이후 총이 등장해서 양궁이 많이 쇠퇴했지만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그 나라 민족 고유의 활들은 다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주몽이나 이성계가 활을 잘 쐈다면 유럽의 로빈훗, 윌리암 텔이 있다. 활 잘 쏘는 특별한 민족이란 없다.
한국 양궁의 성공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뚜렷한 목표의식과 치밀한 전략 그리고 뼈를 깎는 노력의 결과였다. 우리가 1980년대 중반부터 약 10년 동안 거칠 것 없이 독주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후 여자는 좋은 성과가 나오는 데 비해서 남자는 그렇지 못했다. 그 이유를 냉철하게 분석해 본 결과 장비의 문제였다.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 시절, 세계장비의 시장은 미국이 약 70%, 일본이 30%였다. 보통 2~3주기로 신제품이 출시가 되는데. 주로 우리나라 남자 선수들은 미국제품 활을 사용했고 여자들은 일본제품 활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각각 일본제품을 사용하던 여자선수들은 활을 구입하기가 용이했지만 미국제품을 쓰는 한국의 남자 선수는 정말 힘들어 했다. 미국에서는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미국과 경쟁이 될 만한 국가의 선수들에게 철저히 양궁 신제품의 보급을 차단하고 자국 선수가 좋은 성과가 나오는 이후에 판매했다. 이런 기업의 전략적 차원 때문에 올림픽 때만 되면 미국 장비 구입하기가 힘들었다. 선수들을 지도해야 될 감독, 코치들이 올림픽 때만 되면 미국 전체를 돌아다녀서 우리 한국 선수가 쏘아야 될 활을 구입하는데 모든 열정을 쏟는다. 결국 그 장비의 한계로 인해서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미국에 1점 차이로 금메달을 내주게 되었다.
나는 그때,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느꼈다. 우리는 진정 세계 최고가 아니었다. 장비를 가지고 있는 미국, 일본의 회사에서 장비를 팔지 않으면 바로 맥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었다. 그래서 1996년 올림픽 이후, 우리만의 독특한 최고의 장비를 개발해보자는 여론이 모여서 대한양궁협회를 중심으로 약 600명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5일 동안 양궁 사상 최초로 세미나를 열었다.
여러 가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들이 많이 나왔다. 가장 기초적인 초등학교·중학교 두 종목만큼은 절대 외제 장비를 사지 못하도록 규정을 바꿔 버렸다. 각 시도에 있는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났다. ‘도대체 너희들 정신이 있는거냐, 없는거냐? 우리 아이가 외제 장비 사용하지 못하게 해서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장래 문제, 진로 문제 다 책임질거냐?’ 며 항의가 빗발쳤다. 더욱이 그때까지 우리나라에 국산 경기용 활 만드는 회사가 하나도 없었다. ‘국산 활이 없는데 외제 장비를 사용하지 못 하게 하면 도대체 뭘 가지고 쏘라고 하느냐?’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국산 경기용 활 만드는 회사는 하나도 없었지만 장난감 활 만드는 회사가 3곳 있었다. 장난감 활 3개사 들이 직원 5~8명 데리고 가내수공업으로 활을 만들어서 개당 2불~3불10센트로 유럽에 수출하고 했다. 그때 당시에 장난감 세 개 회사 중에 두 개 회사가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하였고, 몇몇 지도자들이 장난감 양궁 회사의 공장에 살다시피 하고, 카이스트에서 양궁개발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국산은 절대 안 된다. 이미 30년, 40년 기술적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미국제품, 일본제품이 있는데 장난감 활이 어디 따라갈 수 있다고 하느냐? 미친 짓이다.’라고 하였다. 심지어 양궁인들 중의 몇몇은 장난감회사라고 고발한다고까지 하였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끝나고 1년 반 정도 지난 뒤 우리에게 뜻밖에 행운의 사건이 터졌다. 우리 전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국가운동, IMF였다. 미국에서 달러가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하는데. 1996년, 1997년도에 미국 정부는 활 한 세트가 350만원이 되었다. 활은 수명이 6개월이다. 초등학생 어린아이가 1년에 2개, 700만원의 돈을 주고 활을 쏠 수는 없었다. 1998년 중반에 활 한 대당 1100만대로 올라갔다. IMF 시절에 초등학교 어린아이가 일 년에 활 두 대 2200만원을 소비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외제 활을 쏠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11~12만원만 주면 사는 국산 활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개발은 계속되었고, 그 결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한국에 있는 선수단 전원이 사상 최초로 우리 활을 들고 나가서 금메달 4개 중에 3개를 획득하였다. 전 세계 양궁계가 경악했다. 한국선수가 쏘는 활은 미국 제품도 아니고 일본 제품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세계에서는 ‘한국은 정말 무서운 국가다. 전 세계 양궁계가 아무런 엄두도 내지 못했던 저 활을 언제 개발했을까?’ 라고 생각했다.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에서 또 다시 우리 한국 선수가 시드니 올림픽때 보다 몇 단계 업그레이드 된 최첨단 양궁을 들고 나가 금메달 4개 중에 3개를 획득하게 된다. 아테네 올림픽 끝나는 직후에 제품의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외국선수가 우리가 만든 활을 사용한다. 2008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10명중 8, 9명이 들고 나온 장비가 우리 장난감 회사가 만든 활이다. 지금 현재 전 세계 양궁 시장 67%를 장악하고 있다. 그런데 더 고무적인 것은 탑클래스 양궁 선수 90% 이상이 우리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30년 전에 돈이 없어 못 샀던 미국의 활처럼, 우리의 활이 이제는 동남아·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들에서는 돈이 없어 살 수 없는 활이 되었다.
나는 우리나라 양궁에서 보았듯이 모든 일에 성공과 실패는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며. 조직 관리에 달려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공정성이 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를 선발하기 위해서 전년도 2007년도에 약 1500명 정도의 선수가 일 년에 10~13번 정도 경기에 출전한다. 각각 1등부터 1500등까지 성적이 나오면 1~100등까지만 2008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준다. 1500명에서 100명으로 압축하는 과정이 일반인 상상을 초월할 수 없는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그래서 선발된 이 100명의 선수로 10달 동안 10번의 대회를 거쳐 남자 셋 여자 셋을 뽑아낸다. 이 세 명의 선수가 한국의 양궁 국가대표다. 올림픽 때마다 세 명안에 선발 될 수 있을 때까지는 선수들 자신도 자기 관리에 철저하지 못 하면 절대 선발될 수 없도록 제도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10번의 선발 가운데 코칭 스텝은 공정성과 투명성을 통해 조직의 신뢰감을 만든다. 원칙의 기본은 원칙이다. 그 정도로 원칙을 강조한다. 100명의 선수를 대상으로 1차 국가대표 선발 대상자는 체력을 측정한다. 2차는 정신력 테스트, 3차 국가대표 선발전은 바로 집중력 테스트를 실시한다. 4차 국가대표 선발전은 감정테스트, 5차 선발전은 승을 측정하고, 6차 선발전은 환경변화에 적응력을 측정한다. 순간순간 대처능력. 어떤 사회적인 환경이 닥쳐올지라도 아무 개의치 않고 내가 할 일 그대로, 목표를 향해서 정말 정신 차릴 수 있는 이런 선수를 뽑고자 하는 것이다. 7차 선발전이 시작되면 엄청난 신경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 신경 압박감을 극복할 수 있는 바로 극기를 측정한다. 1500명에서 100명의 선수가, 1차 선발전은 64명 선발하고, 2차 선발전 때는 32명. 24명, 16명, 8명. 그래서 7차 끝나고 나서 남자 넷 여자 넷이 남는다. 이 네 명의 선수는 대한민국의 최고의 선수라 누구나 인정을 해준다.
그러나 올림픽 세 명만 출전하게 되어있다. 누군가 또 한 명은 탈락해야 된다. 이 네 명의 선수는 8차, 9차, 10차의 세 번의 선발전은 국제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다. 실제 현장에서는 얼마만큼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선수인지, 그렇지 못한 선수인지를 측정하는 것이다. 세 번의 국제 대회의 승패에 따라서 세 명을 선발하고 최후 한 명은 탈락시킨다. 이 관계를 아는 언론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한국 양궁은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 올림픽 가서 금메달 따는 것보다 더 어렵다”
철저하게 공정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스타선수라도 절대 어드밴티지를 주지 않고 스타선수건, 무명선수건 똑같은 조건으로 선발과정을 거친다. 검증되지 않은, 나이 어린 선수라 할지라도 선발전을 통해 1점이 앞서면 무조건 국가대표로 선발해 준다. 바로 이 작은 원칙 하나가 한국 양궁 계속 살아가면서 새로운 스타가 탄생되는 이유이다. 선발전에 참가했던 모든 선수들은 “아~ 정말 공정하구나, 아직 검증받지 못한 사람도 열심히 노력해서 기록만 높이면 언제든지 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할 수 있는 동기부여와 꿈과 희망을 주는 것이다. 바로 이 작은 이 원칙 하나가 한국에 계속 존속시킨다.
20년 만에 경기 최고의 기록을 냈고 30년 만에 장비까지 개발 했다는 것은 이 작은 나라가 원칙 하나 가지고 25년 동안 세계 정상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인 것이다. 그리고 남보다 앞서나가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월·수·금은 웨이트 트레이닝, 써킷트 트레이닝, 인터벌 트레이닝 중에서 하루에 한 개, 두 번, 세 번. 화·목·금은 전문 기술 훈련, 감정 훈련, 집중력 훈련, 심리 훈련 다양한 훈련을 개발한다. 전 세계 양궁계가 이야기한다. “한국 사람들 정말 양궁계에서 치열하다. 저런 훈련 방법을 어떻게 양궁에 접목했을까?” 라고 놀란다.
전 세계 양궁 국가에 1/3이 한국의 지도자일 정도로 많다. 1년 동안 보안을 유지만 해도 쉽게 남들보다 앞서갈 수 있다. 그런데 1/3로 나가있는 한국인 지도자들, 한국의 동료들, 선후배들, 인턴들이 한국에서 배운 훈련방법을 전 세계에 전파한다. 4~5년 정도 지나면 우리 훈련방법 그대로 따라한다. 외부에서 훈련방법을 따라하게 되는 그 순간에 우리는 새로운 훈련방법을 개발해내야 된다. 쫓기는 자가 더 불안한 것이다.
이런 훈련을 소화하기 위해서 매일 태릉선수들은 5시반에 훈련을 시작한다. 올림픽 결승에서 화살을 몇 발 쏘는지 아는가? 12발이다. 결승전에서 화살 12발을 쏘기 위해서 매일 아침 5시반에 훈련을 시작하여 오후 7시에 종료가 된다. 5시반부터 7시까지 약 900발의 활을 쏜다. 올림픽 결승에서 12발을 쏘기 위해서 매일매일 900발을 쏜다.
우리 양궁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1000발의 열정, 1발의 냉정. 1000발의 화살을 쏘기 위해서는 1000번의 열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결승전 12발 화살을 쏘면서 대충 쏘면 안 된다. 이 화살 1발의 성패가 나의 인생의 미래와 직결돼 있기 때문에 아주 냉정하고 신중하게 쏴야 된다.
공자 말씀 중에 ‘노력을 하는 자보다 더 무서운 자는 즐기는 자’라는 말씀이 있다. 자기 하는 일을 즐기며 사는 자가, 즐기면서 하는 자가 진정한 프로페셔널이다. 우리가 골프를 치면 18홀을 도는데 보통 4시간 정도를 소요한다. 그런데 평균 잔디밭을 걸어가는 거리를 측정해보면 약 8km 정도이다. 약 8km의 잔디밭을 걷는 골퍼는 돈을 내고 걷는다. 똑같이 함께 걸어가는 캐디는 돈을 받고 걷는다. 한 사람은 돈을 내고 걷고 한 사람은 돈을 받고 걷는다. 누가 행복한 사람일까?
홀을 모두 마친 다음에 돈을 내고 걸었던 골퍼는 “아~ 오늘 맑은 공기 속에서 상쾌하게 운동을 참 잘했다.”라고 즐거운 생각을 갖는 반면에 돈을 받고 걷는 캐디는 “내가 받는 돈은 노동의 대가”라고 생각하며 ‘남들은 돈을 내면서 즐기는데 나는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되느냐?’라며 자기 직업을 비하하는 부정적 생각까지 갖는다. 이래서는 성공을 이룰 수 없다.
양궁선수도 엄청난 압박감을 극복하려면 자기 일을 즐기면서 하루 일과를 이겨낸다. 육신의 고통을 오히려 즐기면 된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꿈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즐기는 것이라고 했다. 즐기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뭔지 아는가? 그것은 질긴 자이다. ‘질긴’, ‘끈질긴’, 바로 ‘끈기’이다. 철저한 승리 근성. 바로 자기 일을 즐기면서도 철저한 승리 근성을 가진 자가 이 양궁이라는 종식 속에서 바로 최고가 될 수 있다.
조직사회에서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성공적 잉여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를 필요로 한다. 첫 번째는 지적능력, 자기가 하고 있는 업무에 관련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관련한 누구도 손대지 못할 정도로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바로 인적 네트워크이다. 그래서 지적능력과 인적 네트워크, 이 두 가지가 단합해서 시너지 효과가 발휘할 때 바로 최고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정말 철저히 노력해야 되겠지만 주변에 많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를 잘 쌓아야 한다. 이 인간관계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상대방을 위한 배려와 헌신이 앞서야 한다.
2008 베이징올림픽, 2010 광저우아시안 게임. 한국에 박성현 선수가 마지막 발 한 발 남겨놓고 72점이었다. 한국에서 10점을 쏘면 우리가 1점 차로 금메달이고 9점을 쏘면 동점으로 재결판으로, 8점이면 지는 극적인 상황이었다. 박성현 선수가 화살 딱 하나 남겨놓고 만일 실수 했다면? 더욱이 그때는 단체전이었다. 그 누명이 평생을 따라다닐 것이다. 우리가 잘 쐈는데 개인이 마지막 화살을 실수하는 바람에 금메달 못 땄다면? 지난번 베이징 올림픽 보았겠지만, 중국 관중들이 한국선수가 활을 쏠려고 하면 관중에서 호루라기를 불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으며, 북 치면서 방해했다. 그리스 아테네올림픽 때, 유럽의 수많은 관중들 모두가 한국을 적이라고 생각했다. 한국 선수가 쏘려고 하면 45000명이 한꺼번에 “우~”하고 야유를 퍼부었다. 그 순간의 박성현 선수 입장을 생각해보았는가? 그러나 박성현 선수는 그 순간에도 10점을 쏘았다.
“꿈꿔보자, 할 수 있다” 마음 하나로 엄청나게 노력했을 때 이루어진다. 우연히 원래 열심히 하다보면 되는 것이 아니다. 아픔이라는 것, 최고라는 것은 정말 뚜렷한 노력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최고의 리더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섯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첫 번째는 자신과 무한 경쟁해야 한다. 무한경쟁 시대일수록 뚜렷한 목표를 가져야 뜨거운 열정이 생긴다.
두 번째,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야 한다. 통찰력을 가지면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새로운 것들을 창조해낼 수 있는 상상력, 창조력이 만들어 진다. 앞으로 10년 후에 나의 위치, 20년 뒤에 과연 내가 어느 곳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살아가야만 미래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준비에 실패한 자는 실패를 준비할 것이다.’
세 번째, 끊임없이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라. 항상 혁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내 주변 환경들에 능동적으로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네 번째, 성공의 순간 위기를 느껴라. 박태환 선수가 태극마크를 달고 태극선수로 입단했을 때는 첫번째 꿈은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그 꿈을 20세 되는 해에 이루었다. 그렇게 꿈을 이뤘던 박태환 선수가 1년도 안된 로마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에 전 종목 예선 탈락했다. 박태환 선수는 작은 꿈을 이룬 순간, 그의 작은 성취를 이룬 순간 거기에 젖어 있었다. 전혀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박태환 선수가 이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금번 아시아게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우리가 수동기어의 차를 운전할 때, 자동차가 멈췄다고 생각해보자. 다시 출발하는데 5단에서 출발 할 수 있는가? 다시 처음 1단부터 시작한다. 작은 꿈을 이루는 순간 위기는 시작된다. 작은 성취를 이루는 순간 위기는 시작된다.
다섯 번째, 우리는 가슴속에 진정으로 뜨거운 열정을 가져야 된다. 최고 학부, 석사, 박사, 스펙을 많이 쌓은 자라 할지라도 열정이 없는 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이다. 작고 사소한 승리는 난관의 경쟁에서 이기는 거지만 진정으로 위대한 큰 승리는 자기 자신과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다.
일류인생, 이류인생, 삼류인생이 있다. 일류대학, 이류대학, 삼류대학 있다. 일류기업, 이류기업, 삼류기업이 있다. 그런데 공평한 것은 일류 인생이나 삼류 인생은 하루에 똑같이 24시간이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그 주어지는 기회를 절대 남기지 않아야 된다. 남기지 않을 때, 삼류가 이류가 되고 이류가 일류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감히 45년 전에 최고의 양궁강국이 될 것을 누가 감히 생각했겠는가? 주어진 시간을 최고를 유지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노력을 위해서는 뜨거운 열정이 필요하다. 이 뜨거운 열정을 가진 자만이 바로 성취를 이룰 수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 꿈은 꼭 이루어진다.